양선규 대규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규교대 명예교수

 

“이제 다 이루셨네유?”
“왜 그렇게 잘 풀리시쥬?”
“평소 쌓으신 덕이 많으신가봐유?”

근자에 가까운 후배 동료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옮긴 것들입니다. 모두 저와 제 자식들 이야기입니다. 그중에서도 “이제 다 이루었다”라는 말은 사실 시시때때로 제가 혼자 속으로 되뇌던 말이라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그 말을 하신 후배님은 다른 직장 동료분들께도 제가 외손(外孫)과 친손(親孫)을 연이어 본 것에 대해서 열심히 전파하고 다니신다고 합니다. 제가 퇴직을 해서 직접 전하지 못하기 때문이랍니다.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면전에서 그런 축하를 받으면 저는 황망해져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직 노벨문학상은 못 받았는데유?”

물론 농담입니다. 달리 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입니다. 상대방은 “무슨 말씀이세유?”라는 표정으로 저를 쳐다봅니다. 그러면 또 한 마디 덧붙입니다.

“금년에 받은 이가 83살이라니 아직 시간은 충분하겠쥬?”

그러면 간혹 “어떤 글을 쓰실 건데요?”라고 묻는 분도 계십니다. 진지하면 반칙인데 그렇게 막 나가는 분도 계십니다. 그럴 때는 더 진지해야 합니다.

“작가는 크게 보면 두 종류 아니겠슈? 이것저것 쓰는 축과 오직 하나만 쓰는 축. 이것저것 건드리는 치들은 노벨문학상 같은 걸 못 받아유.”

그러면 보통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섭니다. 원래 반칙왕들은 반칙 앞에서 특히 약한 법이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제 스스로가 그 반칙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울컥해서) 속에서 오기 같은 게 막 올라오는 것입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남? 이제 아들딸 다 잘 커서 남의 부러움을 사고 있는 형편이고, 그동안 조마조마했는데 무사히 정년퇴직도 했으니 남은 일이라고는 글 쓸 일밖에 없는데 이참에 하찮은 목숨이나 걸고 그동안 못쓴 소설이나 콱 써버릴까? 그런 생각이, 진지하게, 반칙으로, 막 드는 것입니다. 마침 그때 《고양이에 대하여》라는 책이 나왔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도리스 레싱의 산문집 ‘고양이에 대하여’가 출간되었다. 여성해방, 계층갈등, 인종차별, 환경재앙 등 현대사회의 모순을 파헤쳐온 레싱의 예리함은 그대로이고, 평범해 보이는 고양이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관찰력 또한 여전히 날카롭지만, ‘고양이에 대하여’의 결은 더없이 따뜻하다. <사람과 고양이, 우리는 둘 사이에 놓인 벽을 넘으려 애쓰고 있다>라며 나긋하게 말하듯 담담히 써내려간 글에는 이 작은 존재들을 이해하려는 유난스럽지 않은 다정함이 배어 있다.”

젊어서 좁은 아파트 실내에서 고양이를 몇 마리 사육했고, <고양이 키우기>라는 중편을 하나 썼고, <고양이를 부탁해>라는 영화로 강의도 몇 년 했고, 지금도 고양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가 쓴 고양이 이야기를 읽지 않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책을 사서 읽으며 출판사 책 소개가 왜 그리 재미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노벨상 수상작가도 별것 없네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는 고양이라는 제 한 몸으로 감싸는 상징에 대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마주하는 온갖 불화에 대해서 쓰고 있었습니다. 그럴 거면 고양이는 왜 데려왔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었습니다. 어쨌든 늙을수록 점점 책 보는 시야가 좁아집니다. 웬만해선 거룩한 것이 눈에 들어오는 일이 잘 없습니다. 다 고만고만한, 제 젊은 날의 ‘고양이 키우기’ 같습니다. 앞으로 책 읽는 일이 점점 더 재미없어질까 봐 지레 걱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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