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정채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교수

재난 트라우마는 리커링 효과(recurring effect)를 동반하곤 한다. 재난을 직면한 당시의 충격을 상기시키는 과거의 기억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1993년 서해훼리호 침몰, 1994년 성수대교 붕괴,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1999년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그리고 2003년 대구지하철 방화에 이르기까지 필자의 삶에서도 대형 사고와 참사가 연도순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중에서도 아마 2014년 세월호 참사가 가장 또렷이 기억되는 재난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2001년 9/11 사건을 경험한 미국의 어린 학생들은 당시 학교 교실의 바닥 타일 문양을 섬세하게 그릴 수 있을 만큼 기억이 또렷하다고 하는데, 그에 준하지는 않겠지만 필자에게 역시 세월호 사건을 맨 처음 뉴스로 접했을 때의 상황과 이에 대해 주변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 모두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손에 잡힐 듯 선명하다. 최근의 10.29 참사는 필자로 하여금 오랜만에 세월호를 떠올리게 하였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그랬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필자도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겪었던 것 같다. 사건 그 자체만으로도 충격적이었음은 물론, 실종자를 수습하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이 정서적 우울감을 경험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에 대한 극도의 피로감은 해당 사건을 둘러싼 정치 진영의 대결과 갈등으로 인해 촉발되었던 것 같다.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지속된 정치적 공방과 공론에서 부유하는 온갖 주장 혹은 설(說)들은 진실과 거짓의 구분을 희석시키고, 합리적으로 사안을 확인하고 판단을 내리려는 시도를 무력화시켰다. 조사 과정과 결과의 객관성 및 중립성에 대한 끊임없는 공격과 불신이 이어졌고, 이를 ‘유언비어 강력처벌’이라는 지침으로 영민하지 않게 대처한 정부는 되려 음모론을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희생자와 유족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스트레스, 피로, 그리고 트라우마를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썩 알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다.

올해였다. 2022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8주기를 맞았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월호의 진실을 성역 없이 밝히는 일은 아이들을 온전히 떠나보내는 일이고, 나라의 안전을 확고히 다지는 일입니다. 지난 5년, 선체조사위원회와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검찰 세월호 특수단, 세월호 특검으로 진실에 한발 다가섰지만, 아직도 이유를 밝혀내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진상규명과 피해지원, 제도개선을 위해 출범한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주길 당부합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꼈다. 해마다 4월 16일이 되면 뉴스 헤드라인을 보고 잠시 스치듯 세월호를 떠올렸을 뿐, 수년간 기억에서 지운 채 애써 잊고 지냈던 주제에 말이다.

재난의 상황에서도 일종의 이행기 정의 혹은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가 있다. 재난으로 인해 발생한 사회적 갈등과 부정의(injustice)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을 복원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이행기 정의는 진실(truth)과 화해(reconciliation)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절차로 이해될 수 있다. 해당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화해를 가능케 함으로써 분열이 아닌 통합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명확한 진상규명이 분열된 우리 사회를 통합시키기 위해 분명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내게 이태원이 세월호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바란다. 세월호는 화물 과적, 고박 불량, 무리한 선체 증축으로 인한 침몰 사고이고, 이태원은 다중 밀집 인파사고가 예견되었음에도 최소한의 안전조치를 마련하지 않은 치안의 부재가 가져온 참사이다. 과거의 사실을 확인하고, 현재의 미비점을 점검하며, 미래의 대안을 마련하는 데 있어 진영의 논리는 비켜 서 있어야 한다. 158명의 시민이 사망한 참사를 마주하고, 이를 슬퍼하고 기도하며 고인들의 넋을 비는 추모 집회마저도 다 함께 못하는 나라에서 우리가 과연 사회통합을 논할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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