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희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이문희 대구경북연구원 연구위원

지난 2020년 10월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막혔던 해외출장을 5개월 만에 재개하면서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 있는 ASML이었으며 지난 6월에도 ASML 본사를 한 번 더 방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SML은 초미세 반도체를 생산하기 위한 필수 장비인 ‘극자외선(EUV) 노광기’를 독점 생산하는 기업으로 세계 반도체 장비 분야 시가총액 1위의 절대 강자이다. 반도체 업계에서는 ASML이 생산하는 EUV 장비만이 유일하게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미세회로를 새길 수 있기에 ‘슈퍼 을(乙)’이라는 닉네임으로 부른다. 특히 1대당 가격이 약 3000억원에 이르며, 내년부터 출시 예정인 ‘하이 뉴메리컬어퍼처(NA) EUV’는 6000억원에 달한다. 그러나 1년에 생산할 수 있는 EUV 노광장비는 50여대에 불과하고 주문 후 납품까지 1년~1년 6개월 정도 걸리는 만큼 파운드리 업체 간 선점 경쟁이 치열하다. 현재 최대규모로 EUV 장비를 확보한 곳은 대만 TSMC로 100여대의 압도적 규모이며, 삼성전자는 15대 가량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TSMC보다 앞서 세계 최초로 차세대 반도체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트렌지스터 기술을 적용한 3나노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면서 퀄컴, 엔비디아 등 글로벌 고객사를 선점하기 위한 공격적인 기술경쟁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EUV 장비 공급이 이루어질 때만 가능한 것이며, 이 회장이 더 많은 EUV 장비 확보를 위해 직접 나서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근 ASML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과 장비 공급을 확대하는 추세에 발맞춰 경기도 화성 동탄에 약 2,400억 원을 들여 재(再)제조센터와 트레이닝 센터를 갖춘 클러스터 건설을 시작했다. 재제조센터는 ASML이 자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역할을 맡는다. ASML이 한국에 둥지를 틀면서 글로벌 반도체 장비 시장 60% 이상 점유율을 차지하는 4대 기업들이 모두 한국에 거점을 마련했다. 미국의 램리서치는 지난 4월 경기도 용인에 R&D센터를 열었으며, 지난 8월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AMAT)는 한국 R&D센터 건립 계획을 발표했고, 일본 도쿄일렉트론도 내년까지 2000억원을 투자해 화성 R&D센터를 확장할 계획이다. 이들 글로벌 4대 반도체 장비 기업들뿐만 아니라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도 한국 투자를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글로벌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들이 한국에 생산·연구기지를 설립하고자 서두르고 있는 이유는 미·중 무역분쟁의 장기화로 미국 반도체 장비 기업들이 중국 대신 한국을 선택했고, 2019년 7월 대(對)한국 수출규제로 큰 타격을 입었던 일본 소재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생산기지를 옮기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에는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EUV 기반 최대 생산 거점이 있고, ASML의 재제조센터와 트레이닝 센터를 양축으로 하는 클러스터 건설이 추진되기에 글로벌 EUV 생태계의 신속한 합류를 위한 나름의 전략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EUV 장비를 통한 반도체 제조공정에는 EUV 공정 체계에 맞는 다양한 소재·부품·장비가 필요하다.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회로를 새기기 위해 도포돼야 되는 ‘포토레지스트(감광액)’, 카메라로 치면 공(空) 필름 같은 역할을 하는 ‘블랭크마스크’, ‘블랭크마스크’에 반도체 회로 패턴을 형상화해 새겨 넣은 ‘포토마스크’를 먼지나 오염물질로부터 보호하는 ‘펠리클‘ 등이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소재와 부품, 검사장비 등이 필요하다. EUV는 모든 물질에 쉽게 흡수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높은 투과율 달성을 위해 광원 흡수를 막고 반사력을 극대화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기존 공정에서 사용되는 소재·부품·장비의 많은 부분이 사용될 수가 없다.

이에 필자는 빠르게 도입되는 EUV 기술과 관련해 국내 EUV 생태계 활성화를 위한 연구 인프라 확충은 물론이고 소재·부품·장비 기업 육성을 위한 정부 차원의 전략 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EUV 기반의 국내 반도체 생산 거점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는 수도권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소재·부품·장비와 관련해서는 EUV라는 빛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뽑아내어 그 특성을 연구할 수 있는 포항가속기연구소가 지역 내 존재하는 만큼, 이를 중심으로 한 관련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 등이 참여하는 EUV 소재·부품·장비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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