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인간은 몸과 마음을 가진 이중적 존재입니다. 기실 몸과 마음은 하나이지만 때로는 전혀 별개의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몸과 마음을 하나로 설명하는 견해(생물학적, 유물론적 인간관)와 마음이 몸의 주인이라고 설명하는 견해(불가, 유가 등 유심론적 인간관)가 양립합니다. 저는 마음도 몸의 일부라고 보는 쪽에 동조합니다. 마음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모든 것(정신, 영혼, 심리)이 몸에서 발원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아마 수십 년간 무도가(武道家)의 한 사람으로 살아온 것이 많이 작용했으리라 짐작합니다. 몸을 단련하면 마음도 순정(純正)해진다는 것을 체감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아주 독단적이고 무식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몸공부(육체 활동) 없는 자들의 마음공부(지식과 수양)는 모두 헛되다”라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몸을 거치지 않고 책상물림으로만 깨친 것들은 결국 ‘주화입마(走火入魔, 내공이 역류하거나 폭주하는 현상)’로 흐를 것이라는 예단이 드는 것입니다.

무슨 용심에서 그런 도발적인 추측이 드는지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마 인간의 본성 중에는 반드시 발산(發散)시켜서 소진해야 할 것이 있다고 제 스스로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몸을 제대로 단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신의 고공행진을 하던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추락하는 걸 종종 보아 왔습니다. 물론 마음공부와 몸공부를 병행하지 않은 몸사람들(체육인, 무도인)의 무지몽매는 비일비재한 것이었고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결국 인간의 역사는 몸과 마음의 투쟁의 역사라는 생각이 듭니다. 유가에서 말하는 ‘수신(修身)’이라는 말도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고요. 개인 수양을 뜻하는 ‘수신(修身)’이라는 말은 몸 공부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알았던 옛 선인들의 직설법(체험화법)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굳이 수심(修心)이라 하지 않고 수신(修身)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몸과 태도로 나타나지 않는 마음은 진정한 마음이 아니라는 생각에 토대한 것이 아닌가 싶은 것입니다.

그런 ‘몸공부(수신)’에 대한 강조와 요구가 왜 정당한 것인지는 요즘의 신문방송의 정치나 사회면을 볼 때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절로 깨칠 수가 있습니다. 이전투구(泥田鬪狗), 아수라장(阿修羅場), 양두구육(羊頭狗肉), 후안무치(厚顔無恥) 같은 사자성어들이 실감이 납니다. 힘 있는 자들, 가진 자들의 방종과 무교양이 실로 가관입니다. 수신과 제가(齊家,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바로잡음)를 모르는 정치인, 관료, 기업인들 아래서 민초들이 겪는 고통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치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도는 듯한 느낌마저 받습니다.

인간은 쇠와 같습니다. 접어서 두드리고 두드려야 정련됩니다. 날 때부터 강철인 쇠는 없습니다. 불순물 없이 강하고 질긴 쇠를 만들려면 스스로 부단히 접고 두드려야 합니다(외부의 강압으로 접혀지는 것은 트라우마만 양산할 뿐 수신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접어서 두들기는 부단한 실행의 노력이 동반되어야만 인간은 단련됩니다. 제가(齊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윤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바탕에 두고 여러 가지 유익한 불패의 환상들이 지속적으로 선양(宣揚)되어야 합니다. 배타적인 기복(祈福)과 민심교란을 일삼는 사악한 주술들을 멀리하고 자기희생을 전제로 하는 건전한 종교생활이 권면되고 스포츠와 예술, 문학을 중시하는 교양인의 삶의 태도가 두루 권장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사이후이(死而後已, 죽은 뒤에야 그만둠)의 정신으로 수신(修身)에 힘쓰는, ‘접어서 두드리는’ 생활이 체질화된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으로 나서야 합니다. 평생 한 번도 ‘접어서 두드리는’ 삶을 살아본 경험이 없는 후안무치한 얼굴들이 각 방면에서 할거(割據)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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