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세계사는 다양한 주제로 변주된다. 대개 왕조 중심 편년체 서술이 주류를 이룬다. 이는 과거를 이해하는 가장 효율적 방식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향신료 같은 식재료나 금은보화로 상징되는 사치품 그리고 거짓말이 만드는 역사도 있다.

그 가운데 이동 수단의 진화는 세계사 중요한 원동력. 인류는 직립보행으로 생활의 장을 구축했다. 대략 1만 년쯤 전의 농업혁명과 5천 년쯤 전에 4대 문명으로 도시혁명을 이룩했다. 7세기에 낙타와 범선을 활용한 이슬람 제국이 형성됐고, 13세기에 말의 기동성으로 몽골제국이 탄생했다.

칭기즈칸이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 건설이 가능했던 이유는 뛰어난 승마 기술 덕분이다. 몽골군은 경장 기병으로 이뤄져 기동성이 월등했다. 유년 시절부터 말과 생활한 숙련된 궁수로서 압도적 전투력을 지녔다.

이후 15세기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선박에 의한 대서양 세계가 펼쳐졌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몽골제국은 저물고 유럽의 열강이 등장했다. 말의 시대에서 배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18세기 산업혁명으로 철도와 증기선이 보급됐고, 오늘날 자동차와 비행기가 주요 교통수단이 되었다.

말은 일세를 풍미한 주인공이자 문명 발전을 이끈 견인차다. 한데 말은 겁이 많다. 공격 무기가 없기에 방어만 가능하다. 오직 스피드 하나로 포식자를 피해 생존에 성공했다. 말의 체온은 사람보다도 1도가 높다. 또한 기억력이 좋아서 나쁜 경험은 오래 간직한다. 말의 기분은 귀를 보면 안다. 흥미가 있으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불안할 때는 좌우의 귀를 따로 놀린다.

다들 선망하는 명품 브랜드 중에는 말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에르메스는 파리에서 마구상을 하던 무두질 장인이 핸드백 제작에 성공한 사례. 또한 달리는 기사를 형상화한 버버리와 말편자 모양을 가진 페라가모 그리고 청바지를 당기는 두 마리 말이 그려진 리바이스가 그러하다.

말을 표상으로 삼은 차량 엠블럼도 상당하다. 개선장군의 말을 뜻하는 라틴어 에쿠우스와 질주하는 말인 갤로퍼 그리고 귀여운 말인 포니가 대표적. 또한 페라리·포르쉐·머스탱도 말과 연관된 브랜드다. 말은 포니를 포함해 167종이 넘는다. 포니는 키가 작은 말로서 초보자가 탄다. 천연기념물인 제주마도 여기에 속한다. 말의 키를 재는 단위는 ‘핸드’다. 1핸드는 10센티 정도.

역사에 이름을 올린 명마도 많다. 알렉산드로스의 애마 ‘부케팔로스’는 지금도 대왕이 건설했던 도시명으로 남았다. 이는 유명한 말이기에 차와 경주마 명칭에 제법 사용한다. 동양엔 항우의 오추마와 관우의 적토마가 회자된다.

근대에 들어 말은 구시대 유물로 비극적 존재가 되었다. 최초의 전면전인 제1차 세계대전은 끔찍한 인명 피해를 냈다. 피투성이 살점과 헝겊 조각만 남은 시신들. 한데 수백만이 출정했으나 그 누구도 인정치 않는 동물이 있다. 바로 말이다. 전쟁터엔 다친 말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뒤덮였다. 18살 나이로 참전한 작가 레마르크는 소설 ‘서부 전선 이상 없다’에서 이를 묘사했다.

한국은 전형적 산악 국가다. 스텝 유목민과 달리 기마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다. 짐을 끄는 용도로 소를 이용했다. 한데도 고려 시대부터 말들의 노고를 추모하는 국가 제례인 ‘마당제’를 봉행했다. 매년 상주에서 이 행사를 재현한다니 진정한 ‘동방예의지국’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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