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김경민 한국YMCA전국연맹 사무총장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는 유럽의 철학자 지젝의 책 이름이다. 한국 시민은 여러 가지로 깊은 분열과 공백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해방과 함께 맞은 분단의 아픔으로부터 한국전쟁, 영호남 분열로 인한 동서의 분열로의 확대, 세대 간 격차, 양극화, 진보와 보수의 갈등 등으로 인해 한국의 공론장은 진영별 아우성으로 가득 차 있다. 어떤 이야기도 서로 공명하며 새로운 담론을 생산하는 성숙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양상은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더욱 뚜렷해 지고 있다. 남북문제의 해법으로부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김진태 지사로부터 비롯된 채권시장의 위기, 10·29 참사의 원인과 책임에 이르는 진단까지, 심지어 순방외교에서 대통령의 무심결에 뱉은 발언 내용에 대한 진위 논쟁 ‘바이든?’ ‘날리면?’과 MBC 기자 전용기 탑승 배제 문제에 이르기까지 사실과 사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아전인수 격 팩트 체크와 사실의 상식적 의미를 억압하는 막무가내식 논리로 가득 차 버린다. 정치 사회적 토론은 진영 간 말꼬리 잡기로 시작해 말꼬리 잡기로 끝나버리는 것이 일상이다. 사실에 기반 한 비판적 성찰과 이를 통한 새로운 경로의 모색이라는 사회 정치 담론의 효과는 도대체 기대할 수 없고 공론장은 소음으로 항상 가득 차 있다. 토론 속 언어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과 불신, 증오로 가득 차 있다. 정치공간에서 숙의 민주주의의 가능성과 토대는 찾아보기 힘들다.

슬라보예 지젝이 제안 한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성숙한 시민의 덕목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개인적 경험을 돌이켜 볼 때 성숙한 사랑의 경험은 항상 상대방의 부정적인 점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태도 즉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를 통해 깊어지고 성장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사랑하는 대상의 아픔이나 약점은 그래서 그녀를 더욱 사랑하는 이유가 되지 결별의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기꺼이 부정적인 것과 머무르는 힘 이것이 사랑의 묘약을 먹은 자들의 신비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타자를 향한 불신과 증오는 상대방을 절멸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로 줄곧 표출된다. 온 국민이 이미 우려하고 있는 검찰의 사법권 행사가 선택적 정의의 편파적인 칼이라는 점이라면 야당 대표와 어떤 대화도 시도하지 않는 대통령실의 모습도 대표적 단면이다. 상대방의 다름과 차이, 부정적인 것이 상대방을 절멸시키거나 복속시켜야만 하는 동기로 작용하는 시대를 우리는 이미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경험했다.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뿐 아니라 제3세계를 향해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유럽의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가 그 예이다. 그리고 그 탐욕의 과실을 두고 벌어졌던 두 번의 세계대전 또한 다름과 차이를 절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적대성의 생산이 근본적인 이유이다. 물론 상대방의 절멸이나 복속은 제 1세계에 광범위한 경제적 이익을 동시에 안겨 준 것도 사실이다.

다름과 차이가 혐오와 증오를 생산하는 사회는 얼마나 무서운 사회인가? 그리고 얼마나 비생산적인가?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의 과정을 통해 더 깊은 사회적 배려와 통합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갈가리 찢어진 상처투성이의 사회,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찬 사회로 전락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깊어진다.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이 최근 다시 많이 인용되고 있다. 한국사회 엔트로피의 증가가 이미 위험 수준에 이른 것을 반영하는 것일까? 프랑스의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희생제물을 발명해 내고 혼돈의 상황을 통합으로 이행하기 위해 희생축제를 벌인다고 분석하였다. 한국사회가 무고한 희생제물을 찾아 이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안정을 회복하는 원시 고대사회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을 통해 통합과 화해 성장의 정치 사회적 경로를 창조해 낼 수 있을까?

다름과 차이, 부정적인 것에 대해 충분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무르는 성숙한 시민 주체성이 엔트로피를 창조적 네가트로피로 전환하는 열쇠가 아닐까?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즉 적대 자체 속에 머무는 주체의 성숙함을 통해 갈가릴 찢어져 붕괴할 것 같은 우리 사회를 새로운 통합과 진보의 전환으로 이끄는 시민의 윤리학으로 제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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