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마법사든 아니든 항시 마법을 행하고 볼 수 있는 곳이 책입니다. 책에는 현실을 압도하는 숱한 상상력의 마법이 존재하거든요. “마법은 없어도 책은 읽을 수 있으니까...”, 저는 책을 읽으면서 늘 그렇게 다짐합니다. 그리고는 책 속으로 들어가 마법사의 망토를 걸치고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요즘 제가 빠져 있는 ‘읽기의 마법’은 <소나기>와 <데미안>을 하나의 열쇠로 열어보는 것입니다. 두 작품 공히 성장소설의 백미로 알려져 있습니다. 황순원의 <소나기>(1952)는 1953년 영국에서 번역되어 그곳 신문에 연재된 적도 있는데 그곳 사람들에게도 아름다운 소설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1919)은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의 기록으로 유명한 소설입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는 추구의 과정이 성찰적,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에게는 <소나기>는 청소년기의 전반부에, 그리고 <데미안>은 청소년기 후반부에 읽으면 좋을 소설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소나기>는 소년기에 염원하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사랑의 열망을 잘 그리고 있고 <데미안>은 한 소년이 인생의 독립 주체로 커 나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보편적인 고뇌와 고통을 실감 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소설 모두 소년들에게 아름답고 유익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그 주제의 심연에 대해서는 ‘아름답고 유익한’ 설명이 부재합니다. “예술은 설명이 아니다”라고 치부하면 그만이겠습니다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두 소설을 묶어서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계기를 찾는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름다운 심리주의 성장소설이다라는 상투적인 설명으로는 두 작품의 감동에 대한 ‘읽기 마법사’들의 책임과 의무가 완수되기 어렵습니다. “소년기의 청순한 첫사랑”, “새는 알을 깨고 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알은 세상이다. 태어나려면 세상을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와 같은 ‘한 줄의 요약’이나 인상 깊은 작품 구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도 듭니다. “진정한 읽기는 <텍스트>가 내 <콘텍스트> 안에 들어올 때 가능하다”라는 말은 독서론의 금과옥조입니다. 공감, 몰입, 반성, 실천이 함께 하는 공저(共著)로서의 책읽기가 중요하다는 말이겠습니다. 결국 스스로 텍스트 안으로 뛰어들어 자신을 변화 시키고 또 자신의 세계에도 큰 변화를 주는 ‘읽기의 마법’을 실행하는 것만이 진정한 독서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소나기>와 <데미안>은 소년기 독서물로 찾아와서 일생 동안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고전 명작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소나기>만큼 사랑받는 작품도 없을 것입니다. 언제 읽어도 한 줄 한 줄이 심금을 울립니다. <데미안>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분명한 도정(道程)을 제시하고 있어 세계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 두 소설이 ‘아들 연인(Son Lover)의 고독한 사랑 찾기 여정’이라는 심연의 공통 주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읽을 때 ‘읽기의 마법’이 전에 없던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느낍니다. 제게는 <소나기>의 주인공 ‘소년’과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동일한 인물입니다. 제 콘텍스트 안에 들어와서 그들은 그렇게 합체가 됩니다. 그 두 사람은 영원한 사랑의 원천을 향해 끝 모를 여행을 시도하는 소년 영웅들입니다. <소나기>의 ‘소녀’와 <데미안>의 ‘에바 부인(데미안의 어머니)’은 그들 여행의 종착지입니다. 그들 ‘종착지로서의 여성’은 오직 ‘제 한 몸으로 감싸는 상징’으로만 존재합니다. 한 줄의 요약이 가능한 인물이 아닙니다. 빙산의 하단부처럼 우리의 무의식 속에 깊게 잠겨 있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깊고 아늑한 생명의 원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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