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유년의 뜰」(오정희, 1980)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전쟁기에 유년시절을 보낸 작가의 유년의 기록입니다. 어느 국가, 민족에게나 전쟁소설이라는 장르는 있기 마련입니다. 전쟁은 문학의 소재가 되는 가장 보편적인 사건입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그 전쟁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부른 사건이라는 점에서 다른 전쟁들과는 많이 다르다 할 것입니다. 그만큼 비극적인 일들이 더 많았고 그 후유증 또한 깊게 남아있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처음으로 되돌립니다. 모든 문화와 윤리를 파괴하고 삶의 현장을 폐허로 만듭니다. 그래서 작가들이 다루는 전후의 제반 문화적, 윤리적 갈등상황들은 인간의 기본조건들을 점검하는 실존주의 문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정희 단편소설 「유년의 뜰」은 전쟁 시기 후방의 일상적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린 주인공의 눈에 비친 ‘세계의 비참’을 차분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폐허의 현장에서 우리 부모와 형제자매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노랑눈이’라는 어린 화자의 냉정한 시선을 따라가며 작가는 우리의 삶이 어떤 원초적인 장면들을 가지고 있었는지 점검합니다. 오정희 소설의 서사 시간에 따르면 이 소설의 내용(어머니가 화장을 하고 읍내 주막에 나가고 오빠는 그것을 못마땅해 한다는)은 여타의 오정희 소설들이 다루고 있는 사건들 앞에 놓이는 것입니다. 그다음 사건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 바로 유명한(교과서에도 나오는) 「중국인 거리」입니다. 이를테면 어린 주인공이 ‘유년의 뜰’에서 나와 가족과 함께(사춘기를 앞두고) ‘중국인 거리’라는 ‘신세계(기존의 윤리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새로운 삶의 현장)’로 들어선다는 식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의 흐름만을 중시한다면 이런 오정희 초기 소설들은 입사식 소설(이니시에이션 스토리)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어린 자아가 성인의 세계로 들어서며 겪는 고통스런 자기인식을 서술합니다. 그다음 순서라 할 수 있는 「완구점 여인」에서는 전쟁이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서술의 초점이 개인의 내면으로 이동합니다. 동성애가 등장하고, 어린 자아가 낯설고, 어둡고, 내가 모르는 율법이 지배하는 ‘어두운 삶’으로 들어설 때의 공포, 흥분, 전율이 오정희 소설 특유의 톤으로(담담하게, 차분하게, 냉정하게) 묘사됩니다. 오정희 소설 「완구점 여인」, 「유년의 뜰」, 「중국인 거리」는 소녀주인공 입사식 소설 3부작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전쟁을 겪은 한 소녀의 성인식(成人式)을 알뜰하게 묘사합니다. 「중국인 거리」에서는 소설의 결구를 소녀 주인공의 ‘초조(初潮)’로 장식함으로써 「완구점 여인」과 「유년의 뜰」에서 ‘불구적이거나 부정한 것으로 대상화되던 여성성’(모성 부정)을 자기 안의 것으로 가져오는 성숙한 텍스트 무의식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런 호된 입사식 과정을 거쳐 어른이 된 오정희 소설의 주인공이 폭력과 광기, 돈과 권력, 일탈과 방종이 일상을 지배하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깊이 병든’ 세계를 맨몸으로 헤쳐나가는 모습을 담은 것이 「저녁의 게임」(1979)이라는 소설입니다. 누구나 겉모습은 멀쩡합니다. 그러나 그 안을 들여다보면 상상 못할 기괴한 풍경들이 웅크리고 있습니다. 「저녁의 게임」은 그런 ‘상상을 초월하는’ 주체의 분열을 그려냅니다. 화자주인공의 분석적인 진술의 톤(지식인의 어조)과 그가 보여주는 소설 내적 행동(성적 일탈)은 엄청난 파열음을 내며 자가 분열합니다. 그녀에게는 주체의 분열을 초래할 만큼 아픈 기억들이 많다는 것이겠지요. 우리의 ‘유년의 뜰’에는 소름 끼치는 것들이 많습니다. 오정희 소설은 그것들을 묘사해내는 탁월한 수완을 보여줍니다. 당신의 유년의 뜰은 안녕하신가요? 그렇게 오정희 소설은 묻습니다. 오정희 소설의 심리묘사가 ‘섬뜩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온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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