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중국의 4대 발명품은 나침반과 화약 그리고 인쇄술과 종이가 꼽힌다. 한결같이 세계 문명을 견인한 과학기술. 그중 종이는 후한의 환관인 채륜이 제조했다고 전한다. 7세기경 한반도와 일본에 전해졌고, 8세기에 아랍과 당나라가 맞붙은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제지술이 서방으로 퍼졌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는 기록의 재료가 단순했다. 돌·나무·진흙판·파피루스·양피지 등으로 무겁거나 손상되기 쉬웠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점토판에 문서를 남겼고 이집트는 파피루스를 사용해 문물을 발전시켰다. 중국은 주로 죽간을 이용했다. 사마천이 집필한 ‘사기’는 대표적 사례다.

특히 나일강 삼각주에 무성했던 갈대류 식물로 만든 파피루스는 지중해 전역에 보급됐다. 이는 유럽 언어에서 ‘종이’를 뜻하는 단어의 기원이기도 하다. 또한 점토판 중에는 ‘홍수 서판’이 유명하다. 이라크 니네베에서 출토된 것으로 메소포타미아 설화를 담았다. 이는 종교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구약성경이 신성한 계시가 아닌 중동의 전설이란 사실을 입증한 탓이다.

인쇄술은 종이의 발달과 궤를 같이한다. 15세기 태동한 르네상스는 알프스산맥을 경계로 다르게 전개됐다. 알프스 남쪽인 이탈리아는 다빈치와 라파엘로 같은 예술가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반면 알프스 이북은 신앙 윤리 측면에서 르네상스를 수용했다. 기독교 타락과 성직자 부패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특히 구텐베르크가 활판 인쇄기를 발명해 대량 간행한 성서는 르네상스를 부채질했다. 16세기에 루터가 종교개혁이란 대사건을 터뜨린 것도 인쇄술 때문에 가능했다.

구텐베르크는 영리한 사업가였다. 당시 종교가 경제를 움직이던 상황에서 성경을 선택해 출판함으로써 큰돈을 벌었다. 그는 면죄부도 찍었다. 가톨릭교회는 행정상 편했기에 이를 활용했다. 구텐베르크의 진짜 모습은 모른다. 키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상상 초상화가 널리 보급됐다.

고대 문명에서 필경사는 ‘살아 있는 인쇄기’에 비견된다. 이집트에는 선망의 직업군. 파피루스엔 이런 문구도 보인다. ‘필경사가 되어라. 그러면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손은 고와질지니 새하얀 옷을 입고 궁정 대신의 예우를 받을 것이다.’ 인쇄술이 없던 시절에 필사는 가장 오래된 학생 알바였다. 후한 시대 명장 반초도 그랬다.

때로 책은 인생을 바꾸는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어느 인터넷 서점에서 이를 조사했다. 1위는 ‘성경’이고 헤세의 ‘데미안’과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뒤를 이었다. 작금 성경은 제일 많이 팔린 서적이기도 하다.

수많은 성서 가운데 ‘루터 성경’이 특별하다. 면죄부 판매 항의로 유럽을 발칵 뒤집어놓은 루터는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그의 생전에 50만 권이 넘게 판매된 대박 작품. 이는 자신이 창조한 표준 독일어 덕분에 이뤄졌다. 구어체 표현으로 성경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는 위대한 천재로 평가된다. 인쇄술과 종교개혁과 독일어를 삼위일체로 결합해 세상을 뒤흔든 풍운아.

미국 부통령 시절 앨 고어는 G7 회담에 참석해 언급했다. 금속활자는 한국이 최초로 발명했으나 인류 문명에 영향을 끼친 것은 독일이었다고. 구텐베르크는 시대를 바꿨으나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지금 프랑스에서 전시하는 ‘직지’를 떠올리며 일견 아쉬움에 젖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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