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서병진 경주지역위원회 위원

담쟁이는 바위에도, 나무에도, 담벼락에도, 흙이 아닌 시멘트나 콘크리트의 척박한 곳에도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덩굴나무다. 흙내음 한 번 실컷 맛보지 못하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척박한 토양과 공해를 원망하지 않으며 꿋꿋하게 조용히 뻗어 가는 덩굴성 식물이다.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담쟁이덩굴이다. 매달리거나 덮어씌운 대상을 보호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담쟁이가 사는 법이다.

줄기에서 잎과 마주하면서 돋아나는 공기 뿌리의 끝이 작은 빨판처럼 생겨서 아무 곳에나 착 달라붙는다. 특히 벽면(壁面)에 붙어 자라는 모양새를 보면 재미있다. 대체로 식물의 뿌리는 중력과 같은 방향인 땅속으로 자라고, 줄기는 중력과 반대 방향인 위로 자란다. 담쟁이덩굴의 줄기는 이런 규칙을 꼭 따르지는 않는다. 공간이 비면 위나 옆은 물론 아래쪽으로 뻗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한자 이름은 돌담에 이어 자란다는 뜻으로 ‘낙석(洛石)’이라 한다.

조선조의 선비들은 다른 물체에 붙어서 올라가는 것을 지조 없는 소인배에 비교하였다. 그래도 담쟁이덩굴은 칡이나 등나무와는 사뭇 다르다. 양반가를 둘러치는 토담에는 담쟁이덩굴이 올라가 있어야 제대로 된 고풍스러운 맛이 났다. 지금은 장미와 능소화가 거지반 대신하고, 담쟁이는 숲 속으로 돌아왔다.

담쟁이덩굴은 숲 속에서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른다. 바위를 기어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항시 조용하다. 자신이 의지해서 타고 오르는 나무의 키를 능가하지 않는다, 자신이 의지한 나무를 죽게 하지 않는다. 얼굴을 내밀고 햇빛을 받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빨판을 나무에 붙여 기어오르긴 해도 영양분을 빼앗아 먹지는 않는다. 남을 이용하긴 해도 해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타고 오른 대상에게 윗자리를 내어주는 미덕을 지녔디.

칡은 목본성 덩굴식물 또는 그 뿌리. 동북아시아가 원산지이다. 성장 속도가 빨라, 한 철에 길이가 18m까지 자라기도 한다. 가축의 사료작물로 유용하며, 한국에서는 예로부터 줄기로는 밧줄이나 섬유를 만들었다. 꽃과 뿌리는 약으로, 뿌리는 구황식품으로, 잎은 가축의 사료나 퇴비로 널리 써왔다. 한방에서는 뿌리와 꽃을 약으로 쓴다. 오래된 것은 줄기의 지름이 10cm나 되는 것도 있으며, 지면이나 다른 나무를 타고 왼쪽으로 감아 올라간다.

문제는 칡덩굴이 올라가 자신만이 햇빛을 받고, 타고 오른 나무나 덮어씌운 다른 식물에 햇빛을 차단하여 죽게 만든다.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고, 인간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지만 칡넝쿨이 번지는 곳에 다른 나무가 견디지 못한다. 전부 칡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등나무. 계절의 여왕 5월에 들어서면 쉼터 여기저기에서 연보랏빛의 아름다운 꽃이 수없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등나무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자기 줄기끼리 감기도 하고 다른 나무를 타고 오르기도 한다. 오른쪽 감기가 전문인 등나무는 한여름의 뙤약볕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준다. 콩과식물이라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것도 등나무가 사랑받는 이유 중 하나다.

등나무도 주위의 다른 나무들과 피나는 경쟁을 하여 삶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다른 나무의 등걸을 감거나 타고 올라가 이웃 나무의 광합성 공간을 혼자 점령해버린다.

나는 담쟁이의 삶을 좋아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다. 맨 위에 올라가 숲을 지배하려 들지 않는다. 칡이나 등나무는 선의의 경쟁에 길들어 있는 숲의 질서를 엉망으로 만든다. 갈등(葛藤)을 조장한다. 독차지하려는 삶의 방식이다. 왼쪽으로 감고, 오른쪽으로 감아올리는 칡이나 등나무보다는 담쟁이의 삶을 정치인에게 권하고 싶다. 오른쪽, 왼쪽 너무 감아서 국민은 피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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