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호 포스텍 연구교수·유라시아 원이스트씨 포럼 회장
정진호 포스텍 연구교수·유라시아 원이스트씨 포럼 회장

한국 ESG 학회에서 주관하는 학술대회가 지난 11일과 12일 순천대학교에서 열렸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사람의 눈높이가 아닌 자연의 눈높이로 세상을 다시 보는 방법과 환경과 사회를 돌아보는 이타적 자본주의로의 선회가 필요함을 설파했다. 멸종위기 흑두루미가 돌아오고 최초의 국가정원을 만든 생태도시 순천시의 성공사례를 배우고, 생물다양성의 보고인 순천만 습지를 탐방하는 기회도 가졌다.

한국 ESG 학회에서 기조강연 중인 정진호 교수.

전 세계적인 ESG 열풍은 코로나19가 몰고 온 환경(Environmental)과 사회(Social)와, 그리고 국가와 기업의 지배구조(Governance)문제에 대한 자각과 자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유엔에서 환경문제를 환기시키며 제기했던 지속가능한 개발 목표 SDGs-2030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사회적 지배구조의 문제까지 폭을 넓힌 것이다. ESG 경영은 어느새 시대정신과 대세가 되어버렸다. 그에 맞추어 경북의 대표기업 포스코도 친환경 제철법으로의 선회와 탄소제로 2050를 천명하였다. 탄소 배출기업 철강회사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 가운데, 다가올 전기차 시대를 맞이하여 2차전지 사업의 밸류체인 확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 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기조강연을 부탁받아 'ESG와 철강'이라는 강연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강연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더 깊이 떠오른 문제는 ‘남북한 철강 공동체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 협력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K-ESG의 핵심요소를 (기업시민)-(평화시민)-(세계시민)의 3요소로 요약해 보았다.

K-ESG의 핵심요소 (기업시민)-(평화시민)-(세계시민)

‘기업시민’이란 안전과 복지를 생각하며 투명한 지배구조로 사람과 가족과 기업을 생각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모름지기 기업(lot)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땅을 분배할 때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해 좋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제비뽑기를 통해 하늘이 점지해준 땅으로 받았던 데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그래서 비록 그 땅이 척박할지라도 하늘이 내린 기업이기에 소중히 보살펴야 한다. 회사의 사주는 사업체와 그곳에서 일하는 사원들이 바로 나의 소중한 기업이기에 그들을 단순히 이용하고 쓰다 버리는 소모품으로 취급할 수 없으며 청지기의 사명감으로 그들을 돌보고 열심히 가꾸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업사상이요, 그를 실천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사회가 기업시민이 되는 것이다.

아울러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한 그린 에너지의 개발, 자원 재활용과 쓰레기 처리 문제를 함께 고려하며 생물과 기후와 환경을 생각하는 자연 생존권의 문제의식 속에서 ‘세계시민’의 눈높이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국제 협약들이 쏟아지고 있고 환경부와 산림청 해양수산부 법제처 등에서 일하던 많은 전문가들에 의해 지구환경을 복원하려는 노력들과 그것에 반하는 정부시책과 기업들의 반환경적 사례들에 대해서 들어 알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ESG 시대에 걸맞은 세계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 그를 위해 중앙에 집중된 권력을 줄이고 반드시 지방자치의 실현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나왔다.

기업시민과 세계시민의 기준을 맞추는 것도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언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평화시민’이다. 전쟁을 못 끝낸 분단 민족으로서 언제 다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70년을 살고 있지만, 너무 오랜 세월 타성에 젖어 전쟁 불감증에 걸려버린 한국사회가 평화에 대한 담론을 멈추어 버린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신호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정부 들어서서 남북관계가 긴장으로 치달아가고, 평화와 협력에 대한 어떤 시도도 어떤 노력도 멈추어버린 듯하다. 유엔 SDGs-2030의 4대 전략인 4P(People, Prosperity, Planet, Peace)에서도 평화를 이야기 하는데 말이다. 안타까움을 넘어 두려움까지 안겨준다. 우리가 그동안 쌓아 올린 한국사회의 공든 탑들이 미사일 한방으로 무너지고 마치 우크라이나와 같은 비극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평화의 부재는 곧 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은 모든 ESG 논의와 노력을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할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K-ESG는 ‘평화시민’으로 나아가는 노력 없이는 사상누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함께 만든 기적, 꺼지지 않는 불꽃’책자 표지
‘함께 만든 기적, 꺼지지 않는 불꽃’ 책자 표지

지난해 여름 힌남노의 공습으로 한때 큰 재난을 겪었던 포스코가 전 임직원의 일치된 노력으로 135일 만에 기적과도 같이 공장가동 정상화를 이루었던 감동의 스토리를 담아 “함께 만든 기적,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그 집필진 중의 한 사람으로 재난 현장의 가장 깊은 곳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였으며, “신의 한 수, 철과 물의 전쟁에서 승부수를 던지다”라는 글을 이 책 안에 담았다. 50년 한국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던 국민기업 포스코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뻔했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고로의 송풍 중지와 모터의 가동중지를 명했던 경영진들의 ‘신의 한 수’와 물에 잠긴 포스코를 건져내기 위해 대용량 방사포 2대를 긴급 수배하여 배수를 도왔던 이철우 경북도지사의 기지, 그리고 그동안 ESG 경영을 통해 협력사들까지 한 가족처럼 대하며 ESG 기금을 재난 복구를 위해 쏟아부었던 그 모든 노력들이 합하여 기적을 이루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취재 과정 중에 알게 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었다. 포스코의 쇳물이 처음 쏟아지던 1973년, 포스코의 사가를 작사했던 박목월 시인이 “끓어라 용광로여 조국근대화…(중략)
겨레의 슬기와 의지를 모아, 통일과 중흥의 원동력 되자”라는 가사를 남겼다는 사실 앞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의 감동을 받았다. 포스코가 2050년까지 친환경 수소환원 기술개발에 심혈을 기울이는 요즘, 그 과제를 하고 있던 내가 놀랍게도 이 예언적 가사를 접하게 된 것이다.

오래전 두만강 변 산기슭에 우뚝 서서 북한의 무산시를 내려다보며 혼자 깊이 묵상한 일이 있다. 저곳에 매장된 아시아 최대의 철광석 13억 톤의 자철광이 파쇄되어 분광으로 빛을 발할 그 날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마침내 세월이 흘러, 용광로 시대에는 별 관심을 끌지 못했던 무산의 자철광이 이제 수소환원 시대에는 좋은 기회요인으로 부상하고 있다. 2차 대전 후, 적대 국가였던 독일과 프랑스 등 6개국이 모여서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시작한 것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 (ECSC, European Coal & Steel Community)였다. 그것이 발전하여 EU가 된 것이다. 이제 전운이 다시 감도는 한반도에 남과 북이 함께 하는 철강·에너지·자원 공동체가 국민기업 포스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면 그것이 장차 EU처럼 남북한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미중러일과 함께 동아시아 평화경제공동체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사적 사건이야말로 포스코가 민족과 국가까지 살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국민기업으로 우뚝 서는 일이요, 기업시민을 너머 평화시민과 세계시민을 완성하는, K-ESG를 위한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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