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립아트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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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요,
그래서 슬픔이 말라가요

내가 하는 말을
나 혼자 듣고 지냅니다
아 좋다, 같은 말을 내가 하고
나 혼자 듣습니다

내일이 문 바깥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어요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내일의 냄새를 모르는 척합니다

잘 지내는 걸까 궁금한 사람 하나 없이
내일의 날씨를 염려한 적도 없이

오후 내내 쌓아둔 모래성이
파도에 서서히 붕괴되는 걸 바라보았고
허리가 굽은 노인이 아코디언을 켜는 걸 한참 들었어요

죽음을 기다리며 풀밭에 앉아 있는 나비에게
빠삐용, 이라고 혼잣말을 하는 남자애를 보았어요

꿈속에선 자꾸
어린 내가 죄를 짓는답니다
잠에서 깨어난 아침마다
검은 연민이 몸을 뒤척여 죄를 통과합니다
바람이 통과하는 빨래들처럼
슬픔이 말라갑니다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검게 익은 자두를 베어 물 때
손목을 타고 다디단 진물이 흘러내릴 때
아, 맛있다 라고 내가 말하고
나 혼자 들어요

[감상] “그늘에 앉아 긴 혀를 빼물고 하루를 보내는 개처럼” 나는 살아간다. 이별과 상실은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 어김없이 슬픔의 장마전선을 몰고 온다. 오르내리며 슬픔의 폭우를 들이붓는다. 쩍쩍 달라붙는 슬픔의 습도는 허무의 곰팡이를 키운다. 습습한 삶이다. 쓸쓸한 일상이다. 목숨은 그저 외롭고 높고 쓸쓸하다. 다만, 하루하루, 조금씩, 슬픔이 말라갈 뿐이다. 기어이 슬픔의 방향이 바뀔 것이다. 바람이 달라질 것이다. 언젠가는 서늘한 가을이 온다. 슬픔도 바싹 말라붙는다. 그렇게 낙엽을 모아 불을 피워야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슬픔을 추모하며. <시인 김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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