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천 파리1대학 국제관계사 박사
정상천 파리1대학 국제관계사 박사

작곡가 정율성은 1914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1933년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2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39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중국인민해방군가, 조선인민군행진곡 등을 작곡한 인물로 중국에서는 현대 중국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히고 있다. 6·25 전쟁 때에는 중공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중공군과 북한군의 사기를 고취하는 여러 편의 군가를 작곡하였다. 그는 최근 홍범도 장군과 함께 독립운동행적과 공산당과 관련된 전력으로 논란의 중심에 있다. 무엇보다 그의 고향인 전남 광주시에서 재중교포(조선족) 출신인 그를 기념하는 역사공원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장관직을 걸고 강력히 반대함으로써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박 장관은 심지어 헌법소원까지 제기하겠다는 입장이다. 강기정 광주시장은 “정율성 기념사업은 2002년부터 5명의 시장이 바뀌는 동안 시민의 의견을 모아 진행해온 사안”이라며 “한중관계가 좋을 때 장려하던 사업을 그 관계가 달라졌다고 백안시하는 것은 행정의 연속성과 업무수행 기준을 혼란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밝히며, 정율성 기념사업을 당당하게 추진하겠다는 입장을 확고히 하였다.

우리정부는 노태우 대통령 때인 1988년부터 대(對)공산권 외교정책인 북방외교를 추진하였다. 이를 추진한 목적은 공산권 국가인 중국·소련 등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주의국가와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적 이익 증진과 남북한 교류·협력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함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국가와의 외교 정상화와 남북한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국제관계에 있어서 영원한 동맹은 없다.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념이라는 것은 한낱 장식에 불과하다. 북방외교를 통해 우리는 1990년 러시아, 1992년 중국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1992년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중화민국(대만)과 단교를 하는 아픔이 있었다. 서울 명동에서 대만의 청천백일기가 하강하는 날 대만 화교학생들이 마지막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나라의 힘이 약하면 우방국가도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이 냉정한 국제관계의 현실이다. 연이어 동구권 국가들과 수교를 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경제 10위권에 진입하는 데 있어서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교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보수정부가 들어서느냐, 진보정부가 들어서느냐에 따라 홍범도 장군이나 정율성 작곡가 같은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광주시 입장으로서는 48억원을 들여서 올 연말이면 완성되는 정율성 역사공원을 이제 와서 중단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율성은 6·25 전쟁 때 중공군의 일원으로 직접 참전하여 같은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는 겨누는 대열에 참여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정율성이 의열단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라고 알려져 있지만 근거가 미약하다. 전임 정부에서 정율성을 국가유공자로 추서하려고 시도하였지만 당시 보훈처가 “북한 조선노동당 간부를 맡아 선전선동 작업을 지휘하고, 조선인민군 군가를 작곡한 인물을 대한민국 유공자로 추서하는 것은 법률에 반한다”며 반대한 바 있다. 보훈부가 6·25때 최대 격전지 중의 하나인 다부동에 백선엽 장군 동상 제막식을 하면서 그의 친일 표기 삭제를 검토하겠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그가 독립군을 토벌했던 간도특설대에 근무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자기가 믿는 이념에 따라 잘못된 역사를 미화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권이 바뀔 때마다 동상이 세워졌다 사라지고, 공원이 만들어졌다가 없어질 것이다. 이념을 떠나 음악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율성은 훌륭한 작곡가일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그를 기리면 될 것이고, 그를 미화하지 않는 것이 역사적 관점에서 마땅하고 옳은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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