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수진 소설가
임수진 소설가

달력 한 장 넘겼을 뿐인데, 기온이 확 달라졌다. 서둘러 여름옷과 가을옷의 위치를 바꾸었다. 낮 동안 반짝 더운 듯하지만, 그늘은 서늘하다. 이미 여름은 꼬리를 감아쥐고 저만치 멀어졌다. 오랜만에 공원을 걸었다. 바짝 마른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서로의 몸을 친다. 시작은 늘 끝 지점에 왔을 때 더욱 명확해지는 것 같다.

가을이 보름달처럼 꽉 차면 음미하고 생각할 일이 많아진다. 감정도 물들기 때문인지 10월은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의 어느 한때를 눈앞에 실어다 준다. 삶을 어떤 식으로도 해석할 수 없던 나이. 어쩌면 기억 따위를 재생하거나 재해석할 능력조차 없던 때이지 않았을까. 그러고 보면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보다 훨씬 더 어렸던 열 살이나 열 한 살쯤이었던 것도 같다.

하굣길이었다. 커다란 버스 바퀴 아래로 문구점 부부의 딸이 빨려 들어갔다. 그날 처음 죽음을 보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몰려든 어른들에 떠밀려서 현장에서 멀어졌지만, 문구점 주인 부부의 울음소리는 꽤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었다. 이후 그 언니를 다시 볼 수 없었고 문구점 주인은 물건을 팔 때도 계산해 줄 때도 웃지 않았다.

웃음을 잃어버린다는 의미를 깨치지 못할 나이라 그냥 또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기억의 왜곡이 없다면 그게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 언저리였던 것 같다. 그즈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별’ ‘죽음’ ‘슬픔’ 같은 단어를 심도 있게 고민했고 인생의 진리를 알아버린 듯 골방으로 숨어 들었다.

교과서 밑에 문학작품을 숨겨두고 읽는 일이 많아졌다. 엄청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 소설 속 인물처럼 뻣뻣하게 굴며 죽음의 모호함에 설익은 해석을 내놓았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사춘기를 보냈다. 그때 접한 에밀리 디킨슨 시는 단순하지 않은 질문과 같았다. 미국 출신인 천재 시인은 은둔하며 시에 집중했다. 자발적 고독 속에서 1,800여 편의 시를 썼지만, 생전에 발표한 시는 고작 10편 남짓이다.

큰 고통 뒤에는, 형식적인 감정이 찾아오네/신경은 엄숙히 자리를 잡고, 무덤처럼/경직된 심장이 묻는다/그였나요, 고통을 겪은 이가/중략/발은, 기계적으로, 돌아다니네/ 나무처럼 뻣뻣하게/땅이고, 하늘이고, 또는 가야 하는 곳으로

사실 열일곱이나 열여덟 살에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시였다. 은유와 상징의 폭이 넓고 함축된 단어와 단어 사이의 무한 간극은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았지만, 어둠이 어둠에 스며든 분위기가 좋았다. 의미를 뛰어넘는 그 무엇, 시를 뒤덮은 그림자. 웃고 있는데, 슬픔이 느껴지는 얼굴을 마주한 기분이랄까.

오랜만에 디킨슨의 시를 다시 읽는다. 사춘기 때와 다르게 읽히지만 독특하고 쓸쓸한 느낌은 그대로다. 발이 기계적으로 돌아다닌다는 문장은 지금도 좋다. 어린 마음에 각인된 문구점 주인의 모습이 그랬다.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 로봇처럼 계산하고 습관적으로 물건을 정리하고 셔터를 내리고 올리던 모습. 엄청난 고통을 겪은 이들은 어제처럼 걸어 다니고, 말하고, 먹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어제를 다시 만들 수 없다는 걸 안다.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의 권위자인 베셀 반 데어 콜크 박사는 우리 몸은 극단적인 일을 경험하면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되는데 무기력하고 꼼짝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을 자신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건강한 사람의 마음도 때로는 아플 수 있듯이 평생 독신으로 살며 노출을 극히 꺼린 에밀리 디킨스을 제대로 아는 이는 없지만, 그녀의 시는 독자에게 위로를 준다. 처음엔, 한기, 이어서 혼미, 마지막엔 내려놓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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