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희 소설가
권소희 소설가

정법과 위법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다. 그래서 편법은 지능적으로 진화되고 교묘하게 법을 조롱한다. 불법인 줄 알면서도 을이 되는 이가 있고 을의 약점을 이용한 갑의 착취는 어느 사회나 있기 마련이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란 사회는 불법에 대한 적발은 부지불식간에 이뤄지고 그 징계 또한 상상을 초월해서 세금 포탈이나 노동법 등으로 걸리게 되면 사업체를 접어야 할 만큼 감시는 철저하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불법’이라는 멍에를 목에 걸기 전까지의 일이다. 걸리기 전까지는 모든 위법은 당당하다.

미국에 적합한 신분으로 입국을 하게 되면 소셜 넘버가 주어진다. 모든 직장에서 소셜증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증명서가 없으면 취업은 불가능하다. 한국으로 치자면 주민증 같은 역할을 하는데 신분증도 신분증이지만 세금 신고할 때 꼭 필요한 번호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 근처 알바라도 스트리트와 윌셔 스트리트 코너에 가면 가끔 엄지와 집게손가락만 펼친 손을 흔들며 호객행위를 하는 멕시칸을 종종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가짜로 만든 신분증을 파는 사람이다. 불법으로 입국한 멕시칸들에게는 당장 위조신분증이라도 있어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으니 구매자가 있는 한 위조증 거래는 단속을 피해 성행한다.

인력이 항상 필요한 회사에서는 그 카드가 위조된 것인지 조회하지 않는다. 세금 신고철이나 되어야 그게 위조된 것이라고 발각되니 당장 사람이 필요한 업주 입장에서는 가짜 신분증인 것을 모른 척 고용하는 것이다.

세금 신고를 할 수 없는 처지라면 현금거래로 일을 하면 된다. 현금은 서로에게 거래 흔적이 남지 않으니 수입이 많으면 안 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수표보다는 현금으로 받기를 요구하는 사람도 많다.

내가 맨 처음 받았던 소셜 카드에는 ‘NOT VALID for EMPLOYMENT’라고 표시되어있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나도 현금으로 임금을 받아야 했다. 일자리를 찾던 중 윌셔 가의 한 사무실에서 면접을 보게 됐다. 안경을 낀 남자가 나를 맞아주었다. 그런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그가 딸깍 문을 잠그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하긴 했지만 ‘설마 무슨 일이 일어나랴?’하고 태연하게 몇 가지 그의 질문에 답을 했다. 그러더니 그 남자가 덮어놓고 운전면허증과 소셜증을 요구했다.

나는 엉겁결에 면허증과 소셜증을 지갑에서 꺼내 들었고 말릴 틈도 없이 그는 2장의 증명서를 복사했다.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제 소셜증은 ‘일할 수 없다’고 적혀있는데요!”

그제야 그는 내 신분증을 한참을 보더니 돌려주었다. 원래 신분증은 정식으로 채용이 될 때나 요구하는 데 그 남자는 나를 채용하겠다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신분증부터 받은 것이다. 그날 밤 한숨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복사한 타인의 신분증으로 뭘 할 건지 오만 가지 재수 없는 경우의 수가 머릿속에서 와글거렸다. 다음 날 그 사무실에 다시 찾아갔다. 사무실은 굳게 닫혀있었고 ‘연락을 달라’고 사무실 문에 포스트잇을 붙여놓았어도 연락 두절이었다.

분명 그 안경 낀 난자는 내 신분을 도용하기 위해 막무가내로 신분증을 복사했을 것이다. 하지만 ‘NOT VALID for EMPLOYMENT’라는 문구 때문이었는지 내가 걱정했던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아차, 싶었던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니 위장에서 쓴 물이 올라온다. 그 일은 서곡에 불과했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스폰서를 구해야 하는 절박함은 LA의 산타모니카 해변가의 팜츄리 나무에 어른거리는 노을을 즐길 마음의 여유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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