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고 싶었습니다

김기동 포항스틸러스 감독
“그는 단 한 번도 빛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K리그의 레전드로 반짝이고 있었다”

김기동(52).

그는 대한민국의 가장 강인한 축구선수였고, 가장 영리한 명감독 중 한 명이 됐다.

1971년 충남 당진에서 출생한 그는 송악초 재학 시절 축구를 접하게 됐고, 40년 넘게 축구만을 위해 살아온 그의 사전에는 ‘축구’라는 단어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지금도 크지 않은 체구인 김기동 감독은 축구공을 차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피지컬에 있어 남을 능가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현역시절 별명은 ‘철인(鐵人) 김기동’이었다.

시골 마을인 당진에서 축구를 시작해 신생팀이나 다름없은 신평중·신평고를 졸업하다 보니 누구 하나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고, 왜소한 체구의 김기동에게 눈길을 주는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1991년 우여곡절 끝에 포항스틸러스 전신인 포항아톰즈에 연습생 신분으로 입단을 했지만 2년 동안 팀에서 한 것은 포항스틸야드 개막연습경기에 출전한 것이 전부였고, 그마저도 2년 만에 보따리를 싸야 하는 신세가 됐다.

그는 누구도 자신에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을 키워 나갔다. 체구가 작으니 체력이라도 좋아야 한다는 생각에 남들이 한 번 달릴 때 자신은 두 번 달렸다.

그의 뜨거운 땀방울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만들었고, 1993년 유공코끼리팀(현 제주유나이티드) 박성화 감독을 만남으로 시작된 희망은 2년 뒤 니폼니시 감독과 만나면서 마침내 꽃을 피웠다.

1993년 유공코끼리에서 7경기에 출전한 김기동은 95년 니폼니시 감독 때부터 풀타임 플레이어로 확고히 자리를 매겼고, 10년간 유공(부천SK 포함)에서만 274경기에 출전했다. 이후 2003년 만 32세의 나이로 포항으로 이적한 그는 9시즌 동안 활약하며, K리그 사상 첫 필드플레이어 500경기 출장(501경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최고령 득점(39세 5개월 27일) 및 도움 기록은 덤으로 따라왔다.

필드플레이어 최다출전·최고령 득점 및 도움 기록은 7년 뒤 이동국에 의해 모두 깨어졌지만 김기동 감독의 기록이 바래진 것은 아니다.

2011년 501째 경기를 끝으로 그라운드를 떠난 그는 2013년 성남 스카우터로 잠시 일하다 2014년 리우올림픽 축구국가대표팀(U-23) 코치로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 뒤 2016년 은퇴 5년 만에 포항코치로 돌아왔다.

2018년 시즌 도중 최순호 감독이 성적문제로 자진 사퇴하면서 포항 지휘봉을 잡게 된 그는 지도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걷게 됐으며, 그의 진가를 알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9년 4월 26일 감독 데뷔전을 승리로 이끈 김기동 감독은 2020시즌 포항을 3위로 올려놓는 것은 물론 K리그 사상 전무후무한 3위 팀에서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명장 대열에 올랐다.

김기동 포항스틸러스 감독이 FA 우승컵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후 2021년 AFC챔피언스리그에서도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결승에 오르면서 그의 지도력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줬다.

그리고 2023년 시즌 개막전까지만 해도 전력상 하위권이라는 분석을 깨고 선두권을 질주하며 시즌 마지막까지 절대강자 울산현대와 우승을 다투는 것은 물론 하나원큐 FA컵 우승을 이끌어 내며 진정한 명장으로 올라섰다.

신출귀몰한 전술 구사로 ‘갓(GOD)기동’‘기동 매직’으로 불리며 한국프로축구 명장 김기동 감독을 만나 봤다.

-감독 첫 우승 소감은.

△감독을 맡고 첫 3년 동안은 우승이라는 목표를 세울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제 자신이 ‘즐기는 축구를 하자’는 게 목표였다. 그러나 3년 차가 되면서 ‘즐기는 축구만으로는 안된다’는 요구도 있었고, 저 역시 ‘우승감독’이라는 커리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팀 창단 50주년이 되는 올해 10년 만에 FA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어 너무 기쁘다.

하지만 기쁨은 딱 하루 뿐이었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다음 경기(ACL예선보다는 울산과의 동해안더비를 지칭) 걱정이 다가왔다.

-어떻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나.

△송악초 4학년 당시 체육선생님이 축구를 권유했고, 5학년 때 지금은 목사님이 되신 박만규·덕규 선교사님으로 부터 축구를 배웠는 데 우리 팀이 군대회와 도대회에서 우승하는 성과를 낸 데 이어 6학년 때부터 진짜 축구를 배우게 됐다.

제가 축구를 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이 많은 데 그 첫 번째가 박만규·덕규 목사님이고, 두 번째는 이기근 가톨릭관동대 감독의 아버지인 이세영 감독님이시다.

대학 시절까지 축구선수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진 이세영 감독님이 제가 초등학교 졸업 당시 당진으로 이주해 신평중 축구부를 창단, 자연스레 신평중으로 진학해 신평고까지 나오게 됐다.

그 이세영 감독님의 손주인 이호재를 제가 데리고 있으니 누대를 이은 인연 같다.

그리고 최순호 감독님은 제가 부천에서 포항으로 올 때, 또 은퇴 후 지도자의 꿈을 키울 때 포항으로 불러주는 등 희한하게 제가 필요할 때 항시 인연이 됐었다.

-선수 시절 가장 생각나는 것은.

△아무래도 1993년 프로데뷔전이 생각나지만 2005년 포항 시절 파리아스 감독이 부임할 당시 무릎 부상으로 인해 자칫 선수생활을 접어야 하는 위기에 처했을 때가 가장 생각난다.

당시 파리아스 감독이 특별한 이유 없이 교체시키는 것에 대해 감독을 찾아가 이유를 묻자 ‘네 프로필에 무릎부상으로 인해 풀타임이 쉽지 않다는 분석이 있어 그랬다’는 답을 듣고 “아무 문제 없다. 한번 써보라”고 요청, 위기를 넘기고 이후로도 6년 넘게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었다.

-선수와 감독 어느 분야가 더 좋은 것 같나.

△선수는 직접 뛸 수 있어 좋기는 하지만 감독은 조합을 만들어 성과를 내는 것이어서 노력한 성과가 나올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감독이 더 좋다고 생각한다.

-포항의 전술이나 팀 운영과 관련 어떤 고민하나.

특별한 운영의 틀보다는 어떻게 경기를 잘 풀어나가야 하나를 가장 많이 생각한다. 특히 경기가 상대팀 페이스에 말려 잘 풀리지 않을 때 선수들이 더 불안해한다. 따라서 풀리지 않은 이유를 신속하게 분석하고 풀어나가려 한다.

-경기 중 교체카드를 통한 전술적 변화로 승리를 따내면서 ‘갓(GOD)기동’ ‘기동매직’이라는 별명이 따른다. 김기동 전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나는 마술사가 아니다. 그러니 매직이란 건 없다.

경기를 앞두고 상대 전력이 애매할 때가 사실 가장 어렵다. 그럴 땐 선수들을 불러 ‘내 생각은 이런 데 너희 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왜냐하면 경기장에서 가장 불안한 것은 선수들이고, 따라서 이런 질문을 통해 선수들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인지시킴으로써 전술적 이해도를 높여주면 경기가 한층 더 잘 풀리게 된다. 그것이 매직이라면 매직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하나 억지로 꼽으라면 ‘내가 피지컬 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부족하지만 경기를 읽는 능력은 남보다 좀 앞선다는 거다(웃음)’.

-선수 시절과 지금 선수들과 다른 점은.

△시대의 변화를 참 많이 느낀다. 내가 선수시절일 때는 주전이 되기 위해 이빨을 깨물었는 데 지금 선수들은 주전이 되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함보다 ‘나와 팀이 맞지않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내가 선수 시절 선발명단에 올라가지 못하면 그 날은 반드시 경기에서 뛰는 만큼 개인훈련을 통해 체력을 비축시켰고, 그게 마흔 살까지 뛸 수 있었던 기반이 됐다.

브라질 선수들이 왜 축구를 잘하는지 아나?

그들은 축구를 통해 신분의 변화를 꾀하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그 훈련량이 결국 실력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요즘 선수들에게 아쉬움이 많다.

-현역선수와 축구지망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앞에서 말했듯이 절실해야 한다. 축구를 해야 하는 절실함으로 자신을 단련시켜야 하고, 어떤 장벽과도 맞서 싸우겠다는 잡초 같은 각오로 일어서면 기회는 반드시 온다.

-K리그 최초로 부자가 한 팀에 있게 됐다. 감독이 보는 아들 준호에 대한 평가는.

△아직 부족함이 많은 것은 확실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날 닮은 건지 대기만성형 선수인 것 같다.

올 들어 축구 실력이 한층 좋아진 것 같아서 기분 좋다.

앞으로 더 많은 노력을 해서 포항의 부자 레전드가 돼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수 시절 ‘아들 준호가 프로축구 선수 김기동을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었다. 이제 프로선수가 된 준호가 아버지 김기동을 뭐라고 하나.

△특별히 뭐라 말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준호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면 매일 새벽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습하러 나갔던 내 모습을 기억하는 것 같다.

여러 가지로 힘들 것인데 아직 나한테는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게 대견스럽다.

그렇지만 엄마한테는 “엄마 나는 장가가서 아들 낳으면 축구 안 시킬래요”라고 그랬다는 걸 보면 힘들긴 한 모양이다.

-끝으로 포항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창단 50주년이 되는 해 우승하겠다’고 했던 팬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무엇보다 기쁘다.

우승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사실 나도, 선수들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주어진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응원하고 도와주신 팬들에게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FA컵 우승컵에는 우리 포항스틸러스 팬들의 지분도 상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스포츠는 매 순간, 매년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포항이 진짜 힘들고 어려울 때 더 많은 성원과 응원으로 힘을 실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종욱 기자
이종욱 기자 ljw714@kyongbuk.com

정치, 경제, 스포츠 데스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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