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로맨스(romance)’라고 하면 보통은 연애나 연애담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뜻 말고도 로맨스란 말에는 ‘전혀 사실이 아니거나 아주 과장된 모험담’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는 근대소설이 나오기 이전의 고대소설들이 거기에 포함됩니다. 로맨스에는 당연히 선남선녀의 연애 이야기도 많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쪽으로 그 말뜻이 흘러간 것이기도 하고요. 서양에서는 근대소설은 노벨(novel)이라는 이름으로 다르게 부릅니다.

현대소설에서는 로맨스와 노벨이 공존합니다. 현실을 왜곡 없이 반듯하게 반영하고 인간사의 디테일을 곡진하고 정확하게 묘사하는 소설도 있고, 판타지 요소를 첨가해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기고 결핍감을 채워주는 로맨스도 있습니다. 국민적 사랑을 받은 두 tv드라마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구한말 배경의 <미스터 션샤인>(tvN, 2018)은 로맨스 쪽이고 병자호란 배경의 <연인>(mbc, 2023)은 노벨 쪽입니다. 시청률을 의식해야 하는 장르인지라 사건 전개와 인물 묘사에는 공히 과장이 따르지만 크게 보면 그렇게 나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과 로맨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성격묘사의 구상에 있다. 로맨스 작가는 ‘실제의 인간’을 창조하려는 것보다는 오히려 양식화된 인물, 인간 심리의 원형을 나타내는 데까지 확대되는 인물을 창조하려고 한다. 로맨스에서 우리는 융이 말하는 리비도, 아니마, 그림자 등이 각각 주인공, 여주인공, 악역 등에 반영되고 있음을 본다. 로맨스가 아주 자주, 소설에서 볼 수 없는 주관의 강렬한 빛을 방출하고, 또 로맨스의 주변에는 알레고리의 암시가 계속 맴도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인간 성격의 핵심적인 것들이 로맨스 속에서 빛나고 있음으로 해서 로맨스는 소설보다 더 혁명적인 장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노드럽 프라이(임철규 역), 『비평의 해부』 중에서>

노드럽 프라이가 “로맨스가 더 혁명적이다”라고 말한 까닭은 그것이 하나의 강렬한 반사경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자기 안의 결핍, 약점, 원망(願望) 같은 것을 선명하게 드러내어 스스로 되돌아보게 하는 것이 로맨스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소설이 작은 것들을 들추어내어서 세상의 불공정, 개인의 좌절, 세대의 비참을 공분 속에서 박멸시키려 한다면 로맨스는 그 이상의 것들을 불러내어 삶의 본질적인 면을 주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로맨스와 소설을 이야기하다 보니 문득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가문 자랑, 조상 자랑 풍조가 생각납니다. 한마디로 유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의식 형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한때 존경하던 양반가 출신 선배 소설가 한 분은 “수백 년간 좋은 환경에서 잘 먹고 잘 배웠으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당연히 좋은 것이 대를 이으며 전승되었지 않겠느냐”며 조선조 양반 후예들의 우량한 품질(?)에 대해서 종종 말하곤 했습니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신분적 우월의식은 그의 작품에도 여실히 드러나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옛날 독일 나치들이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강변하면서 반인륜적 인종 개량을 시도했다는 것이 연상되면서 참 특이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한 나라 조선은 유학자 양반들이 자신들의 신분적 우월성을 확고하게 내세우면서 지배했던 닫힌 사회였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연인>에서는 남주인공을 천민 출신의 신분상승자로, 여주인공을 당찬 양반집 규수로 설정하고 격동기의 로맨스를 최대한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만, 드라마에서도 잘 드러나듯, 이 나라를 말아먹고 죄 없는 동포들이 참담한 고통을 겪게 한 자들이 바로 그들 양반들이었습니다. 양반의 후손이 분명하다면, 그들 양반자식들에게는 오직 부끄러워하고 속죄할 일만 남아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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