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의 주제를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을 통해 본,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과 관계 맺기의 책임”이라고 적은 한 인터넷 해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어이가 없습니다. 내용은 차치하고 문장형식에서부터 비문(非文)입니다. “관계 맺기에 요구되는 책임을 강조하는 작품이다”를 어법적으로 ‘관계 맺기의 책임’으로 축약할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관계 맺기’가 주체(주어)가 되거든요.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도 잘못된 표현입니다. “진짜 소중한 것들은 수치나 계산, 책 속의 지식으로는 포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뜻을 작품 속의 비유적 표현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이 주제라고 하는 것은 전혀 올바르지 않습니다. ‘순수한 어린아이의 눈’이라는 말도 그렇습니다. 여기서 ‘순수한’과 ‘어린아이’는 무의미한 동어반복입니다. 어린 왕자는 보통의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작가가 어렵게 불러낸, 수십 년 기다려 불러낸, 무의식 속의 순수 자아입니다. 그를 불러낸 것은 지금의 ‘나’가 순수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는 반성 때문입니다. 작품 속에서는 ‘6년 전’에 그를 만났다고 말합니다. 이 말도 상징적입니다. 작가에게는 6이 특별한 숫자입니다. 여섯 살 때 그린 보아뱀 그림이 어른들에게 거절당한 기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억압된 자신의 순수 자아를 그렇게 ‘6이라는 수치’로 환치(환기)시킵니다.

작품이 판타지이고 스타일이 상징적인데 그런 작품 안에서 덮어놓고 현실을 찾는 것은 오독입니다. 교훈 찾기에 급급해서 어린 왕자를 ‘순수한 어린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내면의 순수 자아를 불러내는 일이 옆집에 사는 동네 친구 만나는 일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특별한 조건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비행기 조종사인 ‘나’는 ‘사람 사는 고장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사막’에 떨어져 아주 곤궁한 처지가 되어 어린 왕자의 방문을 받습니다. 비행기의 모터 하나가 부서져 사막 위에 불시착한 그 다음날 해가 뜰 무렵 어린 왕자의 ‘야릇한 목소리’가 ‘나’를 깨웁니다. 그것이 환청인가 아닌가를 두고 ‘나’와 독자들은 순간 고민합니다. 그런 ‘인정과 불인정 사이를 오고 가는’ 고민을 거쳐야 비로소 판타지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위기일 때 무의식은 흔히 ‘내면의 목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립니다.


그 목소리는 말했다.
「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뭐라구?」
「양 한 마리를 그려 줘!」

나는 기겁을 해서 후다닥 일어섰다. 눈을 막 비벼보았다. 사방을 잘 살펴보았다. 그랬더니 정말로 이상하게 생긴 조그만 사내아이가 나를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훗날 내가 그를 그린 그림 중에서 가장 잘 된 것이 여기 있다. 그러나 물론 나의 그림은 모델보다는 훨씬 덜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여섯 살 적에 어른들이 화가로 출세할 수 없다고 나를 낙심시켰기 때문에 나는 속이 보이지 않거나 보이거나 하는 보아 구렁이 이외에는 아무것도 그리는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전성자 옮김, 문예출판사, 1998(중판), 8~9쪽]


어린 왕자가 ‘나’에게 나타나는 장면은 느닷없고 도발적입니다. 내 내면의 목소리인 어린 왕자는 현실계의 존재가 아닙니다. 환상을 보는 예술가들에게는 두 가지 결과만 있습니다. 노력 끝에 자기(Self)를 성취하여 노현자가 되거나 비록 자신은 실패했지만 수많은 ‘어린’ 독자들에게 ‘자기를 향한 길’을 뚜렷하게 제시하는 등대 같은 사람이 되는 것, 그 두 가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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