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심은 데 나 자란다 표지.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겨울이면 가슴속에 3000원을 품고 사는 민족 아닌가.

길거리에서 불시에 겨울 간식들을 만난다 해도 언제라도 현금을 꺼낼 수 있도록. 누군가는 현재 내 위치를 기반으로 주변의 붕어빵 파는 노점을 알려주는 맵을 개

발했을 정도로 진심이다. 그뿐인가. 절기를 중요시 여기는 우리 민족은 밤이 가장 긴 동짓날 팥죽을 끓여 집안 곳곳에 두어 귀신과 액운 쫓아내는 풍습을 가졌다.

팥죽에는 나이 수대로 새알심을 넣어 건강을 기원한다고도 한다니, 어쩐지 팥은 한국인의 정서를 그대로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기’ 전문가로서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읽는 생활』 『아직, 도쿄』 『사물에게 배웁니다』 등 다수의 책을 통해 빵, 커피, 종이로 만든 모든

것 등 좋아하는 것에 대한 글쓰기를 계속해온 임진아 작가가 ‘애호하기’ 능력의 정점을 찍는 책을 출간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수년간 계속되어온 띵 시리즈의 스물다섯 번째 주제 ‘팥’ 편 『나 심은 데 나 자란다』가 그것이다.

‘팥’은 그간 띵 시리즈에서 다뤄온 여러 주제들 가운데 가장 원초적인 식재료인 동시에 물리적으로도 가장 미세한 크기답게, 취향 속의 취향을 뾰족하게 세분화하고 깊이 파고드는 임진아 작가의 집요한 즐거움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어떤 특정한 음식만을 가려서 즐겨 먹는다는 뜻의 ‘편식(偏食)’이 아닌, 어떤 음식을 유난히 즐긴다는 뜻의 ‘편기(偏嗜)’에 가깝다고 그는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팥이 아니었더라면 쉽게 꺼내놓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소환한다. 삶을 관통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그에 대한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녹록지 않았던 가정환경과 젊은 부모를 먼저 헤아리느라 정작 마음 놓고 울지도 못했던 자신을 비로소 호빵처럼 뜨겁게 안아주려는 글쓰기적 시도가 읽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찡하게 만든다. 어느 겨울, 두툼한 이불 위에 앉아 배탈이 난 어린 오빠를 대신하여 더 어린 동생 임진아가 오빠의 지시대로 붕어빵을 요리조리 베어 나 심은 데 나 자란다

물며 별것 없이도 까르르 배꼽이 빠져라 웃는 장면은 스노볼 속에 박제해두고 싶을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답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그리고 나 심은 데에는 내가 자란다.

우리가 숱한 붕어빵과 호빵으로 얼어붙은 손가락을 녹이고 배를 불리는 동시에, 그 쉽고 작은 행복에 기대어 긴 겨울을 보내던 마음은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다.

여름이면 제철 과일 신비복숭아를 박스째 쌓아놓고 챙겨 먹듯이, 겨울이면 자연스레 붕어빵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는 사람들 틈에 임진아 작가가 있다. 여름보다 겨울에 조금 더 수다스러워지는 사람들과 함께 충만한 계절 감각을 공유하며 또 계속 나아갈 힘을 얻는 우리들. 몸과 마음이 춥고 시려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에 무릎이 꺾여도, 그럼에도 팥알처럼 옹골찬 붉고 따스한 용기가 책의 곳곳에 알알이 박혀 있다.

마지막으로, 역시 평소에 ‘팥’을 몹시 즐겨 먹는다는 박혜진 문학평론가의 추천도 이색적이다. “어두운 색감, 거친 질감, 팍팍한 식감…. 그러나 첫입에 온몸의 세포를 미소 짓게 하는 깊고 담백한 단맛.”이라는 매력에 푹 빠진 두 사람은 팥을 좋아한다는 공통점 하나만으로도 이미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만 같다.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끼리 좋은 친구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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