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나교 수피아미술관 기획실장·미술학 박사
방나교 수피아미술관 기획실장·미술학 박사

인류 진화 역사 속에서 미술의 기원은 선사시대의 동굴벽화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문자 발명 이전의 현생인류는 상호 간의 의사소통을 위해 몸짓, 울음, 그리기란 원시 미디어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다. 특별한 기록수단이 없었던 시대에 살았던 인류는 그리기나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새기는 방법으로 원초적인 감성 표현이나 억압된 욕구를 표출했을 것이다. 그림 이미지는 텍스트 다음으로 자주 사용되는 미디어이며 발현도 인류 역사의 시작과 궤를 같이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다. 원시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그림으로 여겨지며 상징과 기호를 담고 있는 그림 언어의 다양한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를 좋아한다. 동굴벽화에서부터 고분벽화, 기록화, 현대미술의 낙서화(그라피티), 일상 속 무의미한 낙서에 이르기까지 그림 언어는 감정표현과 의사소통을 위한 흔적의 결과물이다. 이처럼 그리기 행위는 특정한 사람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타고난 내적 표현의 욕구 내지 유한한 인간의 생에서 오는 불안한 정서를 표출하는 본능의 발로가 아닐까 싶다.

라스코 동굴벽화,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 소재

그림은 메시지이자 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문자 탄생의 단초가 된다. 현대 미술에서 그림은 감상자의 문화예술 향유나 예술가의 창의적인 세계관의 표현이지만, 선사시대 동굴벽화는 주술적·신화적 성격과 사냥 문화 상징적 표현으로 당대의 삶과 밀착된 예술이자 생존을 위한 개인이 아닌 집단이 누리는 공동체 예술이었다.

동굴벽화는 연대별 분류 체계로 원시 미술에 해당하지만, 작품성과 규모 면에서 현대 미술과 비교해 뒤처지지 않을 만큼 예술성이 탁월하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가 라스코 동굴을 방문한 후 “구석기시대 이래로 현대미술이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림 언어의 집합체인 낙서는 인간의 표현 본능이 외부로 발현된 가장 단순하고도 자유로운 원시 미디어이다. 인류사가 시작된 이래로, 인간이 거주한 터전 곳곳에 어떠한 양상의 낙서이든지 흔적이 남겨져 있다. 20세기 새로운 장르로 주목받는 낙서화는 현대사회에서 양산되는 불합리한 계층구조, 성역할 갈등, 인종 차별, 예술의 한계성 등에 대한 저항의 상징적 언어이다. 또한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 욕구를 반영한 시대 정신이 담긴 상징으로 현대인을 위로하고 희망을 전달하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동굴벽화나 이집트 유적에 시원을 둔 낙서화는 미술의 원초적 삶과 예술을 표현하는 원시 미디어의 재현으로 도시의 건물 벽이나 지하철 차량 등에 그려진 거리 그림에서 유행하였다. 낙서화의 출현은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대한 재고와 기존의 가치 체계에서 생성된 관습과 통념, 권력 체계에 대한 비판으로 사회 비주류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시대적 자성의 표출이다. 피카소가 현대 미술이 선사시대보다 더 진보하지 않은 점을 비판한 것처럼, 현대인의 정신적 진보 역시 고도화된 문명사회와 무관하게 답보상태에 있다. 현대인의 삶 속에 수반되는 고뇌와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하려면 지식이 아닌 지혜가 담긴 고전(古典)을 통해서 정신적 안정과 진보를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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