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바람은 두 장소의 기압 차이 때문에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 흐름이다. 계절, 고도, 방위, 대기 순환 등에 따라 바람의 이름은 다양하다. 우리 민족은 특히 바람에 민감하다. 실바람, 남실바람, 산들바람, 꽃샘바람, 흔들바람, 노대바람, 싹쓸바람, 심마바람, 곧은바람, 뒤울이, 고든하누 등 순우리말 이름만 스무 가지가 넘는다.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사용하는 바람 이름도 제법 많다. 예쁜 이름 ‘하늬바람’의 ‘하늬’는 뱃사람들 용어로 ‘서쪽’이다. 가을에는 ‘외롭고 소슬한 느낌을 주는’ ‘소슬바람’이 분다. ‘소슬’은 ‘으스스하고 쓸쓸하다’는 뜻이다. 소한, 대한 무렵 한파를 몰고 오는 매서운 찬바람을 ‘삭풍’이라고 하는데, ‘삭’자는 ‘깎을 삭(削)’이 아니라 ‘북녘 삭(朔)’자다.

바람은 위대한 예술가이자 창조와 파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바람이 세월과 함께 만든 산과 들, 강과 바다의 모습을 우리는 ‘풍경’ 또는 ‘풍광’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예술 작품도 바람이 만든 풍경을 능가하기 어렵다. 꽃과 나무는 바람에 의지해 자신의 존재를 표현한다. 바람은 스스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면서 인간의 예술적 영감도 자극한다. 작곡가는 산책길에 귓전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주는 악상으로 불후의 명곡을 창작한다. 시인은 바람이 만드는 잔잔한 파문을 보며 우주적 진리를 깨닫는다. 바람은 무자비한 파괴자이기도 하다. 태풍, 허리케인, 사이클론, 토네이도의 위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은 바람의 가공할 힘 앞에서 교만을 반성하며 겸손해진다.

개인이나 집단이 가지는 열망, 소망, 분노 등의 감정도 바람을 일으킨다. 종교적, 이념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비정상적 광기에 사로잡히면 광풍이 분다. 지금 세계 곳곳에는 자비와 연민, 용서와 화해를 모르는 피바람이 휘몰아쳐 대량 살상과 잔혹한 파괴로 수많은 사람을 죽음의 공포와 기아로 고통받게 한다. 합리적 사고와 판단력을 상실한 정치 팬덤은 형편없는 인간을 위대한 지도자로 떠받들며 패거리의 이익을 위해 법과 상식을 무력화하는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려고 한다. 선거를 앞둔 출마자는 자신을 지지하는 열풍이 불어주길 갈망한다. 힘없는 민초는 김수영의 시가 묘사하는 ‘풀’처럼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맛 나는 신바람을 소망한다. 인류는 지금 자연발생적인 바람보다 스스로 만든 광기와 광풍 때문에 공멸할 위기에 처해 있다.

경북 울진군에 대풍헌이 있다. 대풍헌(待風軒)은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다. 울릉도에 가려는 수토사(搜討使) 일행이 여기서 순풍을 기다리며 머물렀다. 수토(搜討)는 울릉도와 독도 불법 거주자와 왜구의 불법 어로 활동 등을 ‘수색하여 토벌한다’는 뜻이다. 동해의 난류와 한류가 울진 앞바다에서 만나 울릉도와 독도 방향으로 흘러나가기 때문에 울릉도로 가기 가장 좋은 이곳에 대풍헌을 두었다.

새해 벽두 울릉도와 독도를 바라볼 수 있는 대풍헌 뒷산 전망대에 올랐다. 순풍을 기다리는 수토사의 마음으로 동쪽 망망대해를 바라본다. 올 한해 순풍과 역풍, 온 갖가지 광풍과 돌개바람이 번갈아 불며 우리를 혼란스럽게 할 것이다. 주기적으로 대풍헌 전망대에 올라 맑은 정신으로 바람의 흐름을 살펴볼 작정이다. 바람에 묻어오는 풍문의 저의와 바람의 속살에 숨겨진 진의를 찾아내고, 함께 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풍향과 풍속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다. 갑진년 청룡의 해를 맞아 정직한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한 꿈이 실현되면 좋겠다. 그들이 가는 길에 훈풍과 순풍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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