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인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
김영인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원 연구교수

1월엔 모두가 복(福)을 기원하며, 저마다의 소망을 품는다. 올 한해 잘 살아내겠다는 다짐과 야무진 계획도 세운다. 기대와 설렘으로 시작하는 첫 달이어서 냉소보다는 희망이 넘쳐난다. 하지만 우리의 정치는 서로가 덕담을 나누며 웃음꽃이 피는 1월에도 웃지 못한다. 대화와 타협보다는 극한 대립과 갈등의 행태를 변함없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딱하고 안타깝다.

신년 벽두부터 발생한 제1야당 대표 피습 사건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오염된 진영정치와 혐오 정치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정부·여당과 4야당은 ‘김건희 특검법’과 ‘대장동 50억 클럽 특검법’ 이른바 ‘쌍특검법’ 거부권 행사를 놓고 양보 없는 양극단의 정치를 벌이고 있다. 일부 정치인들은 올해 4월에 치러질 총선을 앞두고, 탈당과 창당의 정치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그야말로 작금의 한국 정치는 불신과 분열로 가득 찬 투쟁의 세상이 되었다.

물론 정치는 본질적으로 갈등 지향적이다. 정치는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배분 행위인데, 이때 권력, 명예, 돈과 같은 사회적 가치는 희소성을 가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정치는 사람들의 무한한 욕구를 모두 충족시켜 줄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이런 이유로 정치의 장(場)에서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우고 논쟁하는 모습이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를 투쟁의 영역으로만 한정하는 것은 정치의 본질에 대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과 다름없다.

프랑스의 정치학자 뒤베르제(Maurice Duverger)는 정치를 ‘통합’과 ‘투쟁’의 양면성을 지닌 것으로 규정하였다. 정치가 공동체와 구성원의 통합을 추구하지만, 통합을 이끌 리더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투쟁을 양산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 정치라는 행위도 선과 악, 빛과 어둠, 삶과 죽음처럼 세상 이치가 가진 두 가지 속성을 동시에 지닌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의 정치는 하나 된 물줄기로 흘러가는 통합의 정치보다는 물과 기름으로 나뉘어 서로 대항하는 투쟁의 정치로 치우친 측면이 강하다.

여기서 우린 로마의 신(神) 야누스를 정중히 불러낼 필요가 있다. 야누스는 출입문의 수호신으로 안과 밖을 동시에 바라보는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야누스 신은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구분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이 둘을 연결해 주는 조화로운 융합을 추구한다. 시간적으로는 과거와 미래를 함께 내다본다는 점에서 지난날을 성찰하고 앞날을 준비하는 지혜의 신으로도 불린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달, 1월(January)의 어원이 야누스(Janus)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로마인으로부터 추앙받았던 야누스는 오늘날 이중인격 또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지칭하는 부정적 용어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야누스의 본래 의미가 균형과 중용의 덕목을 두루 갖춘 신이라는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야누스 신은 한쪽 편에 맹목적으로 기대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외치는 행위도, 적과 동료를 구분하는 적대적 행위도 하지 않는다. 세상 만물이 그러한 것처럼 양면성을 인정하고 서로의 다름을 포용한다. 설마 뒤통수가 없는 야누스가 상대의 뒤통수를 치겠는가? 나는 야누스의 공존과 상생의 가치를 믿는다.

2024년, 우리의 정치가 두 얼굴을 갖추는 한 해가 되길 희망한다. 여당과 야당이 국정 방향이나 민생 현안을 놓고 제도권 내에서 치열하게 공방전을 벌이는 것도 좋다. 시민들이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법의 테두리 내에서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마음껏 행사하는 것도 좋다. 다만 싸울 때 싸우더라도 힘을 합쳐야 할 땐 통 크게 협치(協治)하는 멋진 모습을 기대한다. 이것이 우리의 정치가 야누스의 두 얼굴에서 배울 수 있는 값진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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