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영 수필가·고전문학 박사
강지영 수필가·고전문학 박사

정조대에 있었던 실화에 바탕한 <은애전>이라는 작품이 있다. <정조실록>에 기록된 김은애의 옥사(獄事)를 재구성한 이 이야기는 ‘전(傳)’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에 있어 소설적 성격이 두드러진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소설을 배격했던 이덕무가 실제 있었던 사건을 허구적으로 구성하였다는 데서 상당한 주목을 받아왔다. 더하여 예상치 못한 결말로 인해 정조와 정절, 윤리와 관련하여서도 자주 언급되어 왔다. 줄거리는 전라도 강진의 은애라는 처자를 둘러싼 모함과 복수로 요약될 수 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전라도 강진에 은애라는 처자가 살고 있었다. 심보 고약한 노파가 그녀의 집에 찾아와 쌀을 꾸고는 하였는데 은애의 어미가 쌀을 주지 못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분노한 노파가 악소문으로 은애의 정절에 흠집을 내게 된 것이다. 노파의 계략으로 은애는 졸지에 간통녀가 된다. 그리하여 혼삿길이 막히게 된다. 그런 일이 없었다는 은애의 호소는 먹히지 않았고 은애는 결국 간통녀로 낙인찍힌다. 지아비를 잘 섬겨야 한다는 유교질서를 강조한 조선이었으니 간통 소문이 은애를 사회적 존재로 설 수 없게 했을 것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은애는 그렇게 간통녀가 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다시피 한 은애에게 김양준이 나타난다. 이후 은애가 누명을 썼다는 것을 알게 된 양준은 그녀와 혼사를 치른다.

별난 노파의 계략 실패담으로 끝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이후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이어진다. 노파를 용서할 수 없었던 은애가 두 해가 지나 칼을 들고 노파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모략과 계략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은애는 노파의 공모자까지 죽이려 한다. 어머니의 만류로 또 한 번의 살인은 피해 가게 되나 은애의 살인은 임금에게까지 보고된다. 여기에서 이야기는 또 한 번의 반전을 보여준다. 임금이 은애의 억울함에 공감하며 은애의 편에 서기 때문이다. 정조는 살인죄를 앞세워 은애를 처벌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반대편에 서서 순결을 증명하기 위해 노파를 죽인 은애를 벌하면 풍속과 교화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한다. 그리하여 은애의 목숨을 살려주며 상까지 내리게 된다.

누군가의 가정사를 꺼내고 개인사를 멋대로 입을 올리며 ‘좋아요’와 ‘싫어요’로 타인의 삶을 쉬이 재단하는 세상이다. 소문을 낸 자는 두 다리를 뻗고 자고 소문 속 당사자는 영문도 알 수 없이, 변명할 새도 없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게 된다. 이 부조리한 구조가 만들어내는 폭력에 우리는 너무 무감각하다. 단순하고 손쉬운 의사 표현이 은애를 은애로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데 일조하고 있음에도 우리는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의 무심한 관심이 벼랑 끝에 매달린 소문 속 당사자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내고 있다는 것을.

정절과 정조를 교묘히 이용해 은애를 사회적 죽음으로 내몬 노파의 죽음은 인과응보였던 것일까 아니면 그 시대가 만든 비극이었던 것일까. 애초에 소문의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여 은애를 가운데 둔 마녀사냥을 막아섰더라면, 나아가 소문이 진실이라 하여도 결국 그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더라면 노파가 죽는 일도 은애가 살인자가 되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노파의 목숨을 끊어버려야 했을 만큼 억울했을 은애의 심사를 먼저 살핀 정조의 판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본다. ‘풍속과 교화’라는 정조의 말에서 정절을 증명하는 것이 누군가를 죽이는 것보다 위에 두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던져 본다. 종국에는 나라면 어떤 판결을 내렸을까, 내가 마을 사람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자문도 해 본다. 그리하여 당신이라면 이 사건에서 무엇을 가운데 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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