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숙 소설가
김외숙 소설가

내 유년의 기억에는 양조장이 배경으로 있다. 사철 술 익는 발효실이 있고, 마른 목축이고 컬컬한 마음 쓰다듬던, 막걸리를 빚던 집이었다.

내가 사는 이 동네,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 On The Lake)에도 양조장이 많다, 바로 포도로 와인을 빚는 와이너리다.

이곳에는 포도 농장뿐 아니라 복숭아, 사과, 체리, 배 등의 여러 과실 농장도 많은데, 토양과 바다 같은 호수 영향을 받는 기후와 일조량 등이 포도 등 과실 농사에 알맞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복숭아 등의 농장이 포도 농장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와인 애주가가 느는 사회적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 동네는 아이스 와인 생산으로도 알려져 있다. 맛이 들 즈음부터 이랑을 따라 쳐둔 그물 안에서 얼었다 녹기를 거듭하며 단맛을 농축한 포도를, 1월 중 순경 새벽에 수확하여 빚은 와인이 아이스 와인이다. 보통 영하 8도에서 영하 12도로 3일간 지속되면 수확하는데, 추출한 즙을 단맛 속에 있는 자연 효소로 발효시키므로, 나이아가라 산 아이스 와인은 그 맛이 깊고 향기롭기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다.

나이아가라 지역에서는 연례행사로 1월에 아이스 와인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귀한 것일수록 지독한 시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장미 향수도 춥고 어두운 새벽, 발칸산맥의 장미에서 추출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아이스 와인도 가장 향기로운 장미 향도 극한의 악조건에서 흘린 포도와 장미의 눈물인지도 모른다

함께 여물어가던 다른 종류 포도는 이미 오크통에서 발효되고 있을 때, 여태 그물 속에서 단 것 탐하는 새 떼의 공격받으며, 얼음장 같을 온타리오호수면 훑은 칼바람에 시달리며, 폭설의 무게 견디며 묵묵히 단맛 만드는 눈 속 포도의 한 생은 분명, 인고의 시간이다.

혹한 견디지 못한 모든 열매가 스스로 떨어져 땅에서 썩을 때, 포도는 추울수록 가지에서 서로 응집한다. 그리고 포도는, 고단했던 시간을 감내한 자신처럼 삶의 여정에 시달린 인생들을 인고의 쓴맛이 아닌, 아이스 와인이란 달콤한 맛으로 쓰다듬는다, 견뎌라, 버텨봐라, 의미 없이 지나가는 시간은 없더라며. 인생들이 한 잔의 단맛으로도 쓰라린 시간의 고통을 삭이지 못한다면, 잠시 아이스 와인의 취기로 그 고통 잊게 한다.

지금 춥고 고단한 시간 속에 있는가?

달고 향기로운 즙을 위한 시간이기도 하다.

머잖은 훗날 자신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한 잔의 아이스 와인의 의미가 될 시간일 것이다.

의미 없이 지나가는 시간은 없다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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