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희 소설가
권소희 소설가

실크 프린팅 공장에 다닐 때 알게 된 젊은이가 있다. 이름은 모른다. 그가 MIT공대를 나왔다는 것밖에는. 그가 가끔 크리스를 찾아왔다. 크리스를 안다는 건 제임스와도 친하다는 뜻이다. 차분하고 내성적으로 보이는 그가 두 형제와 어울려 다니는 게 양말에 짚신 신 듯 낯설게 느껴졌다. 인연을 맺고 끝내는 일에 정답은 없으니 두 형제와 통하는 공감대가 있었으리라.

그건 도박이었다. 그는 금요일이면 나타나 귀퉁이가 찢겨나간 낡은 소파에 앉아 공장문 닫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또 한 남자, 핸드폰을 5개씩 들고 다니는 남자도 합세했다. 그 남자의 이름도 모른다. 다 도박장에서 만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MIT공대를 나온 남자에게 호기심이 쏠렸다. 그의 학력이 안타까워서다. 삼촌 회사 다녔는데 도박 때문에 쫓겨났다나 뭐라나.

그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된 건 새장 안의 새가 사라진 날이었다. 공장에 새장이 있었다. 노란 깃털을 머리에 얹은 앵무새가 감쪽같이 보이지 않았다. 쥐가 물고 갔다면 깃털이라도 주변에 있어야 하는데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빈 새장을 살피고 있는데 핸드폰 5개를 양손으로 들고 다니는 남자가 다급하게 공장을 찾았다. 그리고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주었다. MIT출신 사내가 호텔 옥상에서 뛰어내렸다는 것이다.

그의 조용한 몸짓과 핏기 없는 얼굴을 떠올렸다. 결국은 그가 갈 곳은 호텔 옥상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자신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다다른 것을 자각했다면 돌아설 수도 있었을 텐데 서른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에게 학력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에게 학력은 또 다른 변신이다. 실크 프린팅 회사를 그만두고 한참 지나서 우연히 크리스와 마주치게 되었다. 반가움에 예전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간에 일어난 일을 주고받던 중에 크리스가 먼저 내게 핸드폰 5개를 들고 다니던 사내의 근황을 말해 주었다.

자신의 아내와 바람이 나서 불법체류자였던 그를 이민성에 고발했노라고. 그리고 그 일로 아내와 이혼했다는 것까지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크리스의 아내는 UC계열 대학교를 졸업한 재원이었다. 사실 그 부부의 조합도 파격적이긴 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명문대를 나온 엄마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공부도 잘했던 모양이다. 그녀가 도박장에 들락거리게 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그곳에서 크리스를 만나게 됐고 그의 친구들과 어울리다 그만 애정 사고가 발생했다. 크리스와 그녀 사이에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누가 부양하느냐는 질문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내가 그 공장을 그만둔 다음 꽤 많은 디자이너들이 프린팅 공장을 거쳐 간 모양이다. 엄밀히 말하면 나는 그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세일즈하는 여자가 들어왔는데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내가 컴퓨터 앞에 앉아있으니 부러웠던 모양이다. 자신이 서울대 지망생이었다는 둥, 자기 자랑을 늘어놓더니 급기야는 다른 디자이너를 끌어들였다. 그 여자가 데려온 디자이너에 밀려서 그만 직장을 잃고 말았다.

어쨌거나 ‘서울대 지망생’이라고 자신을 포장하는 방법은 그나마 양호하다. 타주에 살다가 LA로 이사 온 헬렌 여사의 뉴욕대학 졸업을 의심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미술을 전공했다는데 집에 가면 붓 한 자루 없다고 사람들이 수근댔다. 헬렌 여사가 자신의 전시회에 오라고 나를 청했다. 첫눈에 봐도 초보 수준의 그림들뿐이었다. 헬렌 여사의 작품은 종이접기였다. 너무 어이가 없었으나 면전에서 실망의 기색을 보일 수 없어서 참느라 혼났다. 그 후로도 그녀에 대한 황당한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때부터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아마 또 다른 주로 갔을 것이다. 봉제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리며 ‘이대 나왔다’고 확인할 수 없는 학력을 자랑하는 것도 이민 사회가 안겨주는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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