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고등학교 동기 중에 ‘놀부’가 두 명 있었습니다. 물론 별명입니다. 한 명은 이름이 흥보(興甫)입니다. 그래서 반대로 놀부라고 불렀습니다. 또 한 명은 너무 부지런한 친구입니다. 친구들 일이라면 빠지지 않고 다 챙깁니다. 그래서 또 반대로 놀부라고 불렀습니다. 『흥부전』의 놀부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놀부는 옛날의 그 놀부가 아닙니다. 우리 민족의 집단적 상징이 된 지 오랩니다.

『흥부전』을 읽고 어떤 이가 “놀부의 악행을 희석시키는 것이 그의 경제력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마 고전문학을 전공한 강단평론가였을 겁니다. 『흥부전』에서는 흥부를 통해서 윤리적 인간을, 놀부를 통해서는 경제적 인간을 강조했다고 말하면서 그런 주장을 폈습니다. 그러면서 『흥부전』의 등장인물들에게서 배울 점은 윤리와 경제 그 두 가지다라고도 말했습니다. 현실 경제론자나 투자전문가가 그런 말을 했다면 조금은 이해가 되겠습니다. 그들은 “이익이 있는 곳에 진실이 있다”라고 늘상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자나 평론가를 자처하면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고 어불성설입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한 번 발견해 보고 싶은 과욕이 빚어낸 억지입니다. 문학작품을 이야기할 때는 가정 먼저 작품 내적 리얼리티를 살펴야 합니다. “놀부에게도 배울 점이 있다”라고 말하고 싶으면 작품 안에서 놀부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직설적이든 반어적이든)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런 확인 작업 없이 “인간에게는 윤리도 필요하고 경제력도 필요하다”는 작품 밖의 보편 기준을 가져와서 작중 인물 흥부와 놀부를 대비시키는 것은 심각한 직권남용입니다.

작품 안에서는 놀부의 악행과 경제력은 동전의 양면으로 다루어집니다. 놀부의 경제력이 몹쓸 악행의 뒷배가 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작품 어디에서도 ‘놀부의 본받을 만한 경제력’은 전경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부의 악행을 희석시키는 것이 그의 경제력이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해석자의 머릿속에 어떤 불순물이 스며들어 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합니다. 이를테면 배금주의 같은 것이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부만 탓할 수 없다. 적어도 그는 부지런하지 않았느냐. 경제적 인간으로의 존재 가치는 인정해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우리가 입 밖에 내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그런 해석행위는 『흥부전』의 창작 의도에 비추어 볼 때 악(惡)입니다. 인간은 윤리와 경제 그 둘을 다 갖추어야 완전한 인간이 되는데 흥부와 놀부는 모두 한 가지밖에 가지지 못한 ‘불완전한 인물형(반쪽 인간)’이라고 덧붙인다면 그야말로 악 중의 악입니다. 해석 자체가 가히 놀부 심보입니다.

놀부는 악입니다. 누가 뭐래도 악입니다. 악은 횡행하고 그것을 미워하는 상처받은 민초들의 마음이 더 이상 풀 곳이 없어서 터져 나온 것이 『흥부전』입니다. 그런 까닭에 『흥부전』의 창작 동기를 희석시키는 그와 같은 해석행위는 반민중적이고, 파쇼적이고, 천민자본주의적이고, 반역사적입니다. 놀부는 인성에 내재한 악성(惡性)을 대신(代身)하는 자입니다. 경제사가들의 주장대로 『흥부전』은 장자 상속의 폐해를 그렇게 돌려, 소설적으로, 표현한 작품일 수도 있다는 말까지는 그래도 들어줄 만합니다. 그러나 어떤 빌미를 앞세워서라도 놀부를 미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 순간 우리가 수 천 년 애써 가꾸어온 문학의 존재 의의를 말살하는 것이 됩니다. 『흥부전』에서 선과 악의 대립을 빼버리면 『흥부전』이 아닙니다. 예나 제나 힘센 악을 징벌할 현실적인 방도는 없습니다. 수많은 흥부들이 살던 봉건사회에서야 오죽했겠습니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하늘의 뜻’을 애꿎은 어린 짐승(제비)에게 대행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시의 민초들의 삶이었습니다. 『흥부전』은 오직 선과 악의 대립입니다. 나머지는 다 군더더기입니다. 악은 악일 뿐 다른 그 무엇이 아닙니다. 그걸 지키는 게 책 읽는 자의 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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