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현(구룡포향토사 편찬위원)

역사는 자연에 묻히고 자연은 역사를 이어간다고 한다. 호미반도에서 방치되고 있는 장기목장의 석성(石城)을 문화재로 등록하면 어떨까.

장기 목장성(牧場城)은 구룡포 돌문을 출발해 눌태리 골짜기와 응암산을 넘어 동해면 흥환리까지 약 10여km를 가로지르는 산등성이를 따라 쌓은 돌성이다.

현재 국내 최대 규모로 남아 있는 이 돌성은 여지도(輿地圖), 경주도회좌통지도(慶州都會左通地圖) 등 고지도의 표식과 일치한다.

또 이 돌성(石城)은 전 구간에 걸친 흔적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오랜 세월 호미반도의 역사를 외롭게 잇고 있는 말 목장의 돌울타리(石柵)다.

고대 역사에서 말은 마정(馬政)으로 표현될 만큼 중요했다. 1894년 장기목장이 폐지되기까지 마정은 국가의 중대한 정책이었다.

구룡포와 대보면, 동해면을 포함하는 옛 장기현의 땅 호미반도에 마정(馬政), 즉 장기목장에 대한 사료는 많다.

1988년 해체됐지만 구룡포의 상징이었던 돌문에 관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당시 말의 출입을 통제하며 그 수를 헤아리던 문지기 2명이 있었다고 전한다.

또 목아문(牧衙門)을 설치해 양육하는 말을 관장했고, 목장 안에는 물을 먹이는 웅덩이 50여개소와 눈비를 피할 수 있는 마구 19개소가 있었다.

구룡포 눌태리에는 아직도 거대한 돌문이 남아 있으며, 골짜기 일부에서는 약 3m 높이의 돌성이 원형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역사적 깊이도 있다. 정확한 축조 시기는 연구대상이지만 조선 세종실록에는 1432년 12월 1일 목장 감목관을 장기수령으로 하여금 겸임케 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1432년 이전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유사에는 대보면 강사리에 있는 해봉사 절이 신라 선덕여왕 5년(636년)에 지역 수장의 군마사육을 기원하는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이 현재 석성을 의미한다면 장기목장성은 800여년을 더 거슬러 1400여년의 역사를 갖는다.

특이한 기록도 있다. 안정복의 일성록(日省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는 조선시대 당시 호랑이의 피해가 극심해 호랑이를 사냥하는 산행장(山行將)이 목장에 배치되고 포수와 창군도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결국 호미반도는 말 그대로 호랑이의 고장인 셈이다.

이러한 장기목장은 효종 6년(1655년)에 울산 감목관이 관할하는 울산 남목 휘하에 두게 했고, 말의 방목 규모도 계속 줄었다고 효종실록이 전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탐관오리들이 들끓으면서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경상관찰사가 직접 절목(節目)을 만들어 공포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 동해면 흥환리 바닷가에 대원군 형인 흥인군(興寅君) 이최응이 목장의 폐해를 일소했다는 공덕을 알리는 영세불망비(永世不忘之碑)가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필자는 이처럼 장기목장성이 유구한 호미곶의 역사를 갖고 있음에도 무슨 이유인지 외면당하는 느낌이다. 철강도시 포항은 이제 관광포항을 추진해야 하는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다고 본다.

모처럼 시작된 구룡포 적산가옥 복원과 함께 말목장성을 문화재로 등록하고 관광상품으로 개발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삼면이 바다인 호미반도는 안쪽에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가 꽃피는 동해면, 꼭지부분에 호랑이의 기개와 함께 일출의 고장인 호미곶이 있다.

여기에 바깥쪽 구룡포는 국내유일의 뇌록(磊綠)을 생산하던 뇌성산(磊城山)과 광남서원(廣南書院), 봉수대, 해안을 따라 산재한 수많은 고인돌군(群) 등 긴 역사를 품고 있다.

볼거리가 없다거나 문화 불모지라는 말은 정말 모르는 소리다. 호미반도가 새롭게 도약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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