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 태 일 <편집위원>

불법도청을 의미하는 ‘X파일’이 온통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하긴 X파일이랄 것도 없다. 불법도청은 늘 있었던 일이고 자고나면 터지는 부정부패에도 이 나라 백성이라면 어지간히 면역이 되어있다.

정경유착의 검은 커넥션이 한국정치의 치부란 것도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이미 다 짐작했던 일들을 두고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요란을 떨고 있다.

다만 신물 나는 정치인들의 속임수와 돈 얘기는 이제 지겹다. 썩은 하수구같이 오염된 악취를 풍기는 정치판이니 한강에 빠진 사람 중에서 제일 먼저 건져내야할 사람이 정치인이란 ‘비아냥거림’까지 생겼다.

미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대통령이 된 닉슨도 ‘워터게이트’사건이 원인이었다.

상대후보의 전화에 도청장치를 달고 선거문서를 빼내었다. 백악관이 사건진상을 은폐했고 발뺌을 하던 닉슨의 변명이 거짓말로 밝혀져 사임했다.

한번의 도청사건으로 대통령도 물러났는데 다반사로 행해진 우리 도청사건에는 책임질 자는 없고 소리만 요란한 셈이다.

도청에의 달콤한 유혹은 누구나 있겠지만 밀실에서 주고받은 말이 도청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모든 부정부패도 그것을 은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서 비롯한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다.

중국 후한 때의 청백리였던 양진(楊震)은 형주자사로 있을 때 왕밀이란 선비를 중앙에 천거했다. 왕밀은 금을 품고 찾아와 사례를 하며 ‘한 밤중이니 아무도 모릅니다’하자. 양진이 호통치며 ‘하늘이 알고 귀신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가 아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 하는가?’ 그 후 밀실거래를 경계하는 ‘사지(四知)’란 말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 어리석은 중생이 탐욕에 눈이 멀어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지난 5일 국정원 원장이 ‘과거불법도청실태보고’를 발표해 충격을 더했다.

YS나 DJ정권 때도 불법도청은 계속되었고 디지털 도청기계를 개발해 휴대전화까지 감청했다 한다.

평생 도청에 시달렸다는 DJ가 도청가해자라니 어처구니없고 줄곧 불법도청은 없다고 부인해온 정부는 수십년동안 국민을 기만했다는 점도 기막히는 일이다.

또한 지난 대선 전후해서 갑자기 도청을 중단했다는 발표나 현정부는 도청사실이 없다는 것도 믿기 어렵다.

그것은 지금껏 믿지 못하게 한 정부의 탓이다. 어쨌든 이번 도청파문으로 정치권 전체가 급류에 휘말릴 것 같다.

정치권을 휩쓸 ‘쓰나미’로 좌불안석인 사람도 많겠지만 지은 대로 받는 것이 업보다.

X파일 사건의 해법을 놓고도 여야가 팽팽하다.

여당은 특별법을, 야당은 특검으로 맞서고 있다. 그 밖의 군소정당들도 도청 테이프 공개에 따른 정치적 실리를 놓고 정파적 이해에 따라 저울질하는 눈치다.

특별법제정에는 위헌 소지가 따르며 제3의 위원회구성에도 공정성 시비가 걸림돌이다. 야당의 특검 도입 제안도 내용유출의 우려가 있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에는 도청내용은 공개할 수 없도록 규정해 국민의 알 권리는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있다.

비근한 사례로 동독 비밀경찰의 도청사건인 ‘슈타지 문건’은 우리와 같이 당시 독일사회의 뜨거운 감자였지만 열람은 허용하되 처벌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국정원이 공식적으로 과거사를 밝힌 이상 불법도청 해당책임자를 처벌하여 우리시대의 절대과제인 ‘깨끗한 정치’를 실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권력의 집을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야 하고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끊는 모든 제도적 장치를 강구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의 불법은 일벌백계로 엄히 다스려야 할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정치인 스스로가 생각을 바꾸는 일이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릴 생각은 버리고 진정 국민을 위하는 ‘깨끗한 정치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권력의 함정은 부패이고 부패권력은 필연적으로 붕괴되며, 나라가 망하는 것도 전쟁이 아니라 부정부패임을 명심해야 한다.

한국정치인들이 반드시 고쳐야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권력으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이 근절되지 않는 한 ‘X파일’은 정치판의 유령으로 떠돌 것이다. 자고로 이름 있는 선비들은 이름 없는 돈은 쓰지 않았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