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양선규 대구교대 명예교수

저에게는 삼국지 하면 제갈공명, 제갈공명 하면 읍참마속(泣斬馬謖)입니다. 좋은 차원이 아니라 안 좋은 차원에서입니다. 일종의 독서 저항을 부르는 대목입니다. “한중으로 돌아온 제갈량은 마속을 옥에 가두고 군법에 의해 그를 사형에 처했다. 제갈량은 그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렸다. 마속의 나이 그때 서른아홉이었다”라는 게 읍참마속의 내용입니다. 그 대목에서 저에게 독서 저항이 발생하는 것은 아마도 제갈량보다는 마속에게 더 동정심이 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보통은 주인공에게 더 동정심이 이는 게 정상입니다. 정상적인 독자라면 ‘아픔을 참고 마속을 죽이는 제갈량’에게 동정심이 더 가야 합니다. 그런데 저(무의식)는 그런 작품(주제) 중심 독서에서 벗어나 읍참마속을 “한 번 실수하면 죽는다”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읍참마속의 맥락적 의미는 아무리 애지중지, 총애하던 부하라도 군령과 군율을 세우기 위해서는 눈물을 머금고 목을 베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인데 그 맥락을 순순히 따르지 않고 반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제갈공명으로만 살 수는 없는 법, 때에 따라서는 마속의 신세가 될 경우도 있을 터인데 만약 그 신세가 되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그렇게 맥락을 자의적으로 구성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잘 해보려고 한 일인데 결과가 좋지 않다고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면 누가 일을 맡아 해보려고 하겠는가?”라고 제갈량의 처사를 원망까지 하고 있습니다. 아마 언젠가 그 비슷한 처지에 한 번 놓였던 상처가 있는 모양입니다.

본디 권력자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여러 가지 올가미를 만들어 사용합니다. 주로 2인자들이 그 올가미의 희생자가 되곤 합니다. 권력을 잃는 첩경이 섣부른 후계자 양성이라는 것은 누대의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에 제정신인 권력자들은 절대로 후계자를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2인자 제거 프로젝트를 상시 가동합니다. 올가미를 설치하고 누구든 그 올가미에 들어오면 읍참마속 신세를 만들어 버립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후배’도 가차 없이 처단합니다. 그래야 늘 ‘물 좋은 권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예나제나 잘난 상사(上司)가 못난 아랫것들을 보는 관점은 대체로 다음 세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①안 시켜도 알아서 잘하는 것들, ②시키는 일만 곧잘 하는 것들, ③시키는 일도 제대로 못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①에 해당하는 부하나 후배를 둔 상사나 선배들은 하는 일 없이도 ‘일마다 천복(天福)’인 신세를 누립니다. 매사 사는 맛이 납니다. 그러나 ②나 ③의 아랫것들을 둔 ‘복 없는 자’들은 사는 게 하루하루가 고역입니다. 모든 것을 손수 기획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짜증도 수시로 내야 합니다. 마속은 분명 ①에 해당되던 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갈공명은 그를 총애합니다. 그런데 한 번의 실수로 마속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순식간에 ①에서 ③으로 미끄러지면서 죽임을 당합니다.

오래된 기록을 읽어나갈 때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될 부분은 뼈에다 살을 붙일 때 지금 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살을 붙일 때는 반드시 그때 것을 가져다 써야 됩니다. 경전이나 사서를 읽을 때는 충분하고 넘칠 만큼 맥락적인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읍참마속도 일단은 전통적인 맥락을 존중하는 것이 옳습니다. 제갈량은 자신이 아끼던 재능 있는 부하를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 희생시켰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군율 자체가 무너져 더 이상 군대를 통솔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나라의 존망을 짊어지고 있던 제갈량으로서는 부득이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읍참마속은 여전히 기분 나쁜 말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누구나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행운과 불운 속에서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세상사는 때에 달린 것이지 사람에 달린 것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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