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소희 소설가
권소희 소설가

영주권을 해결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10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처음엔 나는 기고만장했었다. 남편보다 먼저 취업 이민 스폰서를 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옮겨가는 회사마다 오래 버티질 못했다. 인종이나 나이를 대놓고 문제 삼으면 위배 된다고 노동법에 규정하고 있지만 실상은 차별하거나 불이익을 받았다. 나이를 따지지 않는 회사에 들어가면 주먹구구식이라 내가 만족하지 못했고 체계가 잡혀있는 회사에서는 나는 겉돌았다. 이력서에 나열된 이직 기록은 신뢰성을 갈아먹는 약점이 되고 말았다.

내가 취업 이민 스폰서를 찾아 헤매는 동안 남편이 침술 면허 자격증을 땄다. 미국에서는 통상 한의학은 중의학(Chinese medicine)이라 하고 한의사는 침구사(Acupuncturist)라고 부른다. 침구사가 한약을 처방해도 되느냐 의문이 생기겠지만 미국에서 한약 재료는 약이 아니라 허브(herb)로 취급하기에 침구사가 한약 처방을 내려도 불법이 아니다.

남편이 박사과정을 밟은 데는 이유가 있다. 영주권을 신청하려면 합법적인 체류 신분이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석사과정을 마치게 됐고 박사과정도 밟아야 해야 했다. 공부를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가 없었다. 생활비 벌랴, 학비 충당하랴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등록금도 나중에 갚겠다는 조건으로 한의대학교를 다녔다.

어쨌거나 남편은 박사논문을 통과했다. 하지만 학위증서는 받지 못했다. 등록금 $3000을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미납된 등록금을 내지 않고 있다. 한의 면허까지 따고 영주권까지 얻었는데 막상 돈을 완납하려니 아까운 모양이다. 학위증 액자를 벽에 안 걸어도 ‘자신은 누가 뭐래도 박사’라는 게 남편의 지론이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에 한인 가정이 몇 가정이 있었는데 그중 한 부부가 한의대를 다녔다. 우리는 딸만 둘을 두었고 그 집은 아들만 둘이었다. 남편과 같은 한의대는 아니었어도 나이도 처지도 비슷해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동식이네가 이사 간단다. 뉴욕에 사는 친척이 약사인데 스폰서를 해준다고 해서 LA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스폰서를 제공할 능력의 친척이 있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사실 행운이 그 부부에게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그 가정이 뉴욕으로 떠난 후 우리도 금가루 같은 인연이 닿았다. 그리고 몇 년 후 우리도 영주권을 받게 되었고 시간이 흘러서 LA를 방문한 그 가정과 오랜만에 만나 멈췄던 그간의 소식을 나누게 됐다. 나는 당연히 그들도 영주권을 받았을 줄 알고 우리도 신분 해결을 했다고 말했다.

내 말을 들은 동식엄마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네는 아직 받지 못했다며 자기 남편에게는 우리가 ‘영주권 받았다는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자신의 남편에게도 ‘영주권’이란 말을 삼갈 만큼 그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민 신청이 순조롭지 않고 꼬이기 시작하면 그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돈과 시간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제해준 사람은 남편과 같이 한의 공부 하던 동문이 있었다. 그녀는 한의대를 졸업하자마자 한의원을 차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해 영주권을 받은 한의대 졸업생이 10명도 넘는다. 그녀는 영주권을 빌미로 돈을 요구하는 다른 소장수처럼 어떤 금전적인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따금 곰국처럼 감사의 마음이 우러난다. 사례비는 고사하고 스폰서에게 점심 한 끼 대접할 처지도 되지 못했던 시절이어서 그 도움은 뼛속까지 스며든 고마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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