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K국제펜문학회 회장

영화 ‘건국전쟁’(The Birth of Korea, 2023)은 다큐멘터리 전문 영화감독 김덕영(1965~ )이 각본, 감독, 편집을 담당한 진정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서울 출신으로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김감독은 앞서 북한 전쟁고아들의 실상을 추적한 ‘김일성의 아이들, 2020’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로써 국제적인 갈채를 받은 바가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은 어찌해 남북 분단의 원흉, 부정선거의 독재자로 형편없이 폄하됐어야만 했던가? 이 영화는 오늘날의 번영된 조국 대한민국을 낳게한 이승만(1875~1965)에 관한 과도한 오해 대신에 그의 위대한 공적을 늦게나마 제대로 밝혀줬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군에서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났다.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서 수학했으며 졸업시 유창한 영어로 졸업연설을 했다. 대한제국 시절 11년 연상인 서재필 박사의 영향을 받아 ‘독립신문’과 ‘협성회회보’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계몽운동을 했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했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1899년부터 5년 7개월간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 옥중 계몽활동을 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1904년 대한제국 말기 특별사면된 후 도미 후 학업을 계속해 5년에 걸쳐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1910년)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런 지성인이 또 있는가?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6.25 전쟁 중에는 한때 만주로 달아났던 김일성과는 달리 이승만은 해외로 망명하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조국에 남아서 전쟁을 지휘했으며 한강 철교 폭파시에는 민간인을 다리밑 부교로 건너가게 했다.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방위조약 체결로 자유대한민국의 의지를 확실히 하고 국방을 튼튼히 해 지난 70년간 한반도에서는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했다.

1954년 미국에 국빈으로 초대돼 뉴욕 영웅의 거리 카퍼레이드 등 민주국가를 사수한 위대한 동맹국 대통령의 모습을 여지없이 보여줬다.

이승만은 또한 일찍이 남녀차별을 없애었고,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농지개혁으로 소작농 대신 개별농지 내지 산업화토지를 만들어줌으로써 오늘날 대한민국을 가장 건전한 자본주의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게 했다.

한편 1960년 3.15 선거 때에는 야당 대표인 신익희 선생의 급사로 말미암아 이승만 자신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되던 상태였는데, 부통령 후보 등 주변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부정선거의 누명을 뒤집어썼고 급기야 4.19 혁명의 단초가 된 억울한 면이 있다. 당시 부상당한 학생들을 병문안 한 뒤 하와이로 출국했으나 부정부패를 했다는 의혹과는 달리 돈 한 푼 없이 출국해 검소한 삶을 살다가 1965년 하와이에서 서거한 뒤 귀국했다.
 

건국전뱅

이 모든 사실들을 감독은 미국 현지 탐사 등 철저한 고증과 인터뷰를 통해 진실 그대로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이승만은 비록 마지막에 대통령 자리에서 쫓겨나고 반강제적으로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후 그의 시신은 서울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다소의 과오도 있었지만 그가 독립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헌신한 점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이쯤에서 전두환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의 12.12 군사행동은 피의자 정승화를 수사하기 위한 정당한 공무집행이었으며 5.18 에는 개입조차 않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해는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연희동 자택에 보관돼 있다. 조선 제10대왕 폭군 연산군도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묘소를 갖고 있다. 이래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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