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영 수필가·고전문학 박사
강지영 수필가·고전문학 박사

<내 복에 산다>라는 이야기가 있다. 아버지가 딸들을 불러 누구 덕에 사느냐는 질문을 하는 데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버지의 질문에 언니들은 전부 아버지 덕에 산다고 대답하는데 셋째 딸만 유독 ‘내 복에 산다.’라고 한다. 셋째 달은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끝내 집에서 내쳐진다. 쫓겨난 막내딸은 숯구이 총각을 만나 혼인하게 되는데 이후 금을 손에 넣으면서 부자가 된다. 그 사이 막내딸을 내쫓은 부모님은 이후 가세가 기울어 끼니도 해결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러 있다. 이본에 따른 변이가 있기는 하지만 막내딸이 가난해진 부모를 모시는 것으로 이야기는 맺음을 한다.

이 이야기를 읽을 때면 내가 딸이었다면 나는 과연 어떤 대답을 내놓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더불어 부모가 가난했다면 이 대답은 어떻게 들렸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더해서 아버지는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하는 의문도 던지게 된다. 아버지의 질문과 예상치 못한 딸의 대답으로 직조된 이 이야기의 서사구조는 단순하다. 물음과 답은 하나다. 그런데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정해 달리 읽어 보면 대답도 질문도 결코 하나로 읽히지만은 않는다. 왜 이 단순한 서사가 이렇게 복잡하게 읽힐까 해 보면 이야기 속에 아버지가 바라지 않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 통상적이지는 않던 시대라는 또 다른 맥락이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초입에는 수련을 위해 동굴로 들어가 십 년 만에 세상으로 나온 차라투스트라가 숲에서 성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여전히 신의 사랑을 가운데 둔 채 깨우치게 만드는 방식의 사랑을 설하는 성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성자가 숲에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것 같다고.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지만 ‘선언’을 가운데 두고 두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이어져 보이는 게 있다. 가부장적 질서를 중심에 둔 사회에서 막내딸의 ‘내 복’의 선언은 절대 권위에 대한 도전이다.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놓는다는 ‘발언’의 개념 자체가 없었던 당대 여성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막내딸의 ‘내 복’ 이야기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부장제 사화로부터의 일탈 선언이다. 모든 사고의 중심이자 모든 논쟁의 종점에 있던 신의 시대에 동굴에서 나와 세상으로 향하던 차라투스트라가 신의 죽음을 선언하는 것 또한 기존 질서에 반기를 드는 행위다.

이 선언이 환대 받았냐고 하면 그렇지는 않다. 막내딸은 쫓겨나고 니체는 많은 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다시금 고독을 느껴 동굴로 돌아가기를 반복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들은 기존 질서 속에서는 받아들여질 리 없는 이러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관성적 당연함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된다. 그 속에서 어쨌건 내가 ‘나’로서 사고하며 주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존재임을 지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내 복’과 ‘신의 죽음’의 선언에서 과연 우리는 주체적 인간인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AI 발달로 인해 패러다임 변화를 넘어 변혁을 앞두고 있고 SNS 기반의 소통으로 관계가 파편화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나의 판단과 행동에 있어 나의 주관은 몇 퍼센트나 들어있을까? 누군가의 화려한 SNS를 보며 영문 모를 패배감과 허탈감을 느끼고 기계의 진보에 무기력함과 불안을 마주해야 하는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선언해야 할까? 유명세로 치장된 인플루언서나 유명인들이 그 유명세가 이유가 되어 어느 날 문득 비보를 전해오는 참담한 시대다. 기기의 편이함을 이용해 사진을 업로드하고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면서도 우리는 진짜 목소리는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뭔가를 하지 않으면 발 빠른 변화의 흐름에서 밀려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으로 인해 나에게 이 불편한 흐름에 관한 의견을 선언할 권리가 있음을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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