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숙 소설가
김외숙 소설가

‘이월이 벌써 다 갔네.’

이미 중턱을 훨씬 넘어선 달력을 보며 내가 중얼거렸다. 유독 짧은 이 한 달이 끝을 향해 가는 이때면 누구나 습관처럼 하는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그 말속에는 시간의 빠름에 대한 아쉬움의 심정도 있고, 내가 작심하고 시작한 새해의 결심 실천이 짧은 달, 너 때문에 또 다 할 수 없구나, 하는, 짐짓 책임 전가 성의 불평의 의미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그래, 가려면 어서 가거라, 네가 가야 봄이 오지, 하는 야박한 이별 선언의 의미도 있는데, 나도 실은 다르지 않은 심정이다. 이미 긴 겨울에 시달린 탓에 잿빛이 지겨워졌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이월을 두고 짧다느니, 너 때문에 작정한 일 다 못했다느니, 어서 네가 가야 봄이 오지 하고, 야박한 대접을 하는 나름의 이유는 있다. 12월, 1월이 겨울이라고, 네가 왜 겨울이니, 왜 그렇게 춥니, 하고 사람들은 타박하지 않는다. 추운 것이 당연한 성질의 달이니까.

그러나 2월은 다르다. 겨울도 아닌 것이, 봄도 아닌 것이, 어중간한 잿빛으로 봄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만 가라앉게 하고 시리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나이아가라 온 더 레이크(Niagara On The Lake)는 우리나라처럼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한 달 정도 겨울이 더 길다. 우리나라에선 며칠만 기다려 3월이면 봄바람이 불어오고 남녘에서 꽃소식이라도 있지만, 이 동네의 2월은 정말 겨울도 아니면서 겨울 행세하고, 봄은 아직 꿈도 꾸지 말라며 잿빛 날씨로 가라앉게 한다. 이 글을 쓰던 중인 오늘 낮에도, 모처럼 햇빛 화사하고 하늘 또한 짙푸르기에 봄이 모퉁이에 와 있겠거니 하고 나갔는데, 그 화사한 햇살 속에 숨긴 칼칼한 이월의 성질은 여전했다.

그래도 내킨 겸에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이제 며칠 지나면 떠날 이월, 유독 짧게 태어난 이월의 입장에 서 보았다.

이월이 다른 달보다 적은 날의 달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날까? 꽃과 온화한 바람, 따스한 햇살의 달 다 두고, 겨울도 봄도 아닌 어중간한 잿빛의 달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날까? 짧게 살다 사라져야 하는 일도 서러운데, 떠나려면 어서 떠나란 치명적인 이별의 말까지 듣고 싶을까?

그 입장에 서 보니 이월도 나름 할 말이 있을 것 같았다, 사람들이 삶의 편리를 위해 짧게 만들어 놓고 이월을 탓하는 사실에 대해, 무엇보다도 시간을 대하는 인간 언행의 경박함에 대해.

춥다느니, 짧다느니, 어서 가라느니 하는 것은, 인간의 소리일 뿐, 실은 이월이란 시간은 여전히 침묵한다. 그러나 소리 없다고 의미까지 없지 않으니, 이제 곧 떠날 이월이란 시간이 꼭 하고 싶을 말, 그 의미가 무엇일지 각자 잘 해석해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은 우리 몫이다.

‘짧아서 금쪽 시간, 있을 때 귀하게 쓰세요.’
이월이 우리에게 하고 싶을 말, 그것은 혹, 이런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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