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윤일현 시인·윤일현교육문화연구소 대표

경주 보문단지로 들어가는 길목에 신라 26대 진평왕릉이 있다. 이곳은 매년 봄, 가을 내가 자주 찾는 산책과 사색의 장소다. 넓은 잔디밭을 걸으며 세속의 먼지와 번뇌를 털어낸다. 다양한 형상의 멋진 나무들을 바라보면 새삼 세월과 풍우 한설의 힘을 절감하게 된다. 나는 왕릉을 지나 남쪽과 서쪽 들판 걷기를 좋아한다. 홀로 또는 말수가 적은 사람과 들길을 걸어가면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 문학가나 철학자의 육성이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아 좋다. 올해는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걸었다. 아직 냉기를 머금은 바람결에 ‘세계와 우주, 자연은 하나다’라는 니체의 말이 들려왔다. 니체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상징적으로 ‘대지’라 부른다. 이 대지, 자연이야말로 모든 가치의 절대 원천이자 척도다. 그는 신에게 헌신했던 것처럼 자연에 헌신하라고 했다. 그는 천상의 음성이 아니라, 지상의 음성, 이 자연, 이 대지의 음성을 경청하라고 했다. 그는 삶의 어두운 그림자, 도덕적 자학, 허무의 먹구름을 걷어내고 삶과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하라고 했다.

영어단어 3월(March)은 로마의 군신(軍神) 마르스(Mars)에서 유래됐다. 삼월은 어원상으로 만물이 생존과 번식, 가을의 알찬 결실을 위해 서로에게 선전포고하며 치열하게 전투를 시작하는 달이다. 시작이 반이다. 전투를 시작할 때 유리한 고지 선점은 매우 중요하다. 동물은 말할 것도 없고 식물조차도 처음에 자리 잡기를 잘못 하면 꽃을 피우기 쉽지 않고, 가을에 알찬 결실을 거두기가 어렵다. 자연은 서로 한 치 양보도 없이 사생결단의 처절한 경쟁을 하면서도 상호조화와 상생이라는 대자연의 전투 수칙은 반드시 지킨다. 이를 어기는 곳에는 공멸과 황폐함만 남는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는 크고 작은 공천 후유증으로 바람 잘 날이 없다. 정치권의 비상식적 투쟁 방식을 바라보는 국민의 마음은 착잡하다. 선거가 정말 민주주의의 꽃이고 국민적 축제가 맞는가에 대한 회의가 든다. 자연법칙을 엄격하게 준수하면서도 치열하게 경쟁하는 저 초목들에 비하면 인간의 싸움은 너무 추잡하고 비열하다. 자연이라면 벌써 씨도 없이 공멸했을지도 모른다. 일부 후보는 근본 자질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예의도 지키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이 후에 어떻게 처신할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국민은 투표하는 날만 주인이고,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가 된다.”라고 한 장 자크 루소의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유권자가 두 눈 부릅뜨고 그들의 언행을 지켜보며 옥석을 가려내는 수밖에 없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들판을 걷다가 다시 왕릉으로 돌아온다. 고사목조차도 살아있는 나무들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주변 풍경이 감동적이다. 언제 보아도 신비롭고 경이롭다. 살아있는 자연은 자기완성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죽은 것들에게도 저렇게 예의를 표하며 조화와 공존을 도모하기 때문에 아직도 천년의 바람 소리를 온전하게 들려줄 수 있다.

3월의 대지에 귀대면 대자연의 합창 소리가 들려온다. 자연은 구성원 각자의 고유한 목소리를 존중한다. 작다고 묵살하지 않고, 목청이 높다고 특별대우 하지 않는다. 상호 조화와 상생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 화음은 조화롭고 스케일은 웅장하면서도 섬세하다. 오늘의 국내외 상황은 상생보다는 상사(相死)를 향해 돌진하는 것 같다. 국내 정치와 남북 관계는 끝까지 가보자는 막가파식 상사를 떠올리게 한다. 상호존중과 배려, 양보와 타협에 의한 상생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오늘의 삶이 아무리 혹독해도 우리는 항상 봄날의 화원을 꿈꾸며 기다린다. 그게 삶이다. 차가운 바람이 몇 차례 더 몰아치겠지만, 자연은, 우리는 묵묵히 견뎌낼 것이다. 꽃샘바람 시샘해도 꽃은 스스로 피어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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