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주 수필가

이른 아침 까치가 운다. 물오름을 시작하는 감나무에 앉아 먹으러 왔노라 알리듯 요란스럽다. 마치 먹이 빚 받으러 온 빚쟁이처럼 당당하다. 이제 막 텃밭에서 고개를 내미는 시금치를 먹을지 상추를 먹을지, 아니면 전날 먹다 만 봄동을 마저 먹어 치울지 메뉴 결정이라도 하는지 수다 삼매경이다. 그 옛날 동구 밖에서 오는 손님 반기며 울던 그 까치들이 아니다. 잡종견 강아지 둥이 녀석에겐 공포의 소리고 텃밭의 숨탄것들엔 절체절명의 소리다.

한적한 도심 변두리 전원주택으로 이사 간 지인이 날강도 같은 까치를 발고하겠노라 벼르고 있다. 그이가 내민 핸드폰 사진에는 날카로운 부리로 중무장한 놈들이 텃밭머리에 앉아 이제 막 고개를 내미는 여린 새싹을 무자비하게 도륙 내는 횡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인은 성가실 정도가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라며 울상이다. 전원생활을 시작할 때만 해도 아름다운 소리로 알람처럼 아침잠을 깨우던 곤줄박이들의 먹이를 가로채더니, 이제는 더 나아가 아침밥을 먹는 둥이의 대가리를 쪼아낸 뒤, 밥그릇을 통째 접수해 버렸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러다 보니 이사를 반대했던 아내의 볼멘 입찬소리도 들어야 하고, 그물을 겹겹이 쳐 텃밭의 어린것들도 보호해야 하며, 제집에서 한 발짝도 못 나오고 벌벌 떠는 둥이의 대가리치료도 해 줘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며 한숨이다. 저놈들과는 절대로 공생도 상생도 불가하다며 분노했다. 까치와의 한 지붕 공생을 위한 극단의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울지 않는 아름다운 공생은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우리 모두에겐 낙원을 나눠 가질 자격이 있다. 때론 원치 않는 상황에 맞닥뜨리거나,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에 낙원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극복하려는 의지와 실천할 용기만 있다면 작은 발버둥으로도 새로운 상황을 만들고 난관을 넘어서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멀지 않은 곳에 강과 바다, 너른 들판이 생활 터전이었던 내 유년의 마을엔 날짐승이나 들짐승들이 많았다. 먹이가 풍부해서였다. 앞뜰과 뒤뜰에 서너 그루씩 심겨 있는 집집의 감나무에 앉아 마치 주인을 알아보기라도 하듯 깍깍거리는 까치와는 친근한 듯 함께 자랐다. 특히 혼자 나무 꼭대기에 앉아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작은 몸에서 뿜어내는 그 까랑까랑한 울음소리와 짙은 카리스마가 느껴지던 눈빛은 참 좋았다. 넉넉하게 남겨둔 집집의 붉게 익은 연시는 늦가을의 정취를 불러올 뿐만 아니라 시린 겨울을 달래는 까치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마치 잔칫상 받은 듯 까치들은 겨우내 달콤한 연시에 중독되어 지냈으니, 그 정겨운 공생의 모습은 배려와 질서, 순리에 순응할 때 자연스럽게 빛났다.

나는 그 옛날 아버지의 지혜를 상기해 복잡한 마음에 처해있는 지인에게 조언했다. 텃밭 과실나무엔 까치밥을 넉넉히 남겨두고 둥이에겐 저녁밥을 배불리 먹여 까치와의 아침 전쟁을 피하라고 했다. 생존을 위해 숨이 턱에 찼을 그놈들에게 둥이의 아침밥을 절반쯤 양보하면 어떠냐고도 했다. 빼앗으려는 놈들과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들의 치열한 생존경쟁은 더불어 살아가는 질서와 순응하는 서열만이 조화로운 공생으로 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오랜 도시 생활에서 까치를 잊고 살았다. 퇴직해 너른 마당 한편에 텃밭을 일궈 친환경적인 먹거리로 편안한 노후를 보내려던 지인의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생존경쟁을 벌이는 까치를 만났다. 서서히 부서져 가는 일상을 견디는 지인이나 생존을 위해 불온한 동물로 발고 당할 처지의 까치를 보며 상할 대로 상한 마음들을 위로하며 착잡했다.

삶이 팍팍하다. 도처에 분란이 끊이지 않는다. ‘잘 맞고 안 맞고가 어디 있겠는가. 잘해야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그 시간에 함께 있었다는 게 중요한 거야. ’ 누군가 말했다. 그랬다. 우리 모두 공생의 바른 자세로 삶을 보아야 함께 살아남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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