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
한희원 경북독립운동기념관장

명저 사피엔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말한다. 육체적으로 허약한 존재인 호모사피엔스가 만물의 영장이 된 것은 추상적 실재(抽象的 實在)를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추상적 실재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재하는 것처럼 공동체 생활에서 작용하는 그 어떤 것이다. 자유, 정의, 진리, 법인, 국가, 덕(德) 등이 모두 추상적 실재이다.

이들은 만져볼 수 있는 실체물은 아니지만, 공동체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덕이 없는 사람이 정치한다고 생각해 보라. 마찬가지로 덕이 없이 정책을 집행한다고 상상해보라. 정치나 정책은 국민 통합과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포용성, 즉 덕은 절대적이다. 따라서 의사처럼 한 나라의 전문가 집단을 막 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교하게 정책을 추진할 일이다.

우리의 지도자 가운데 덕(德)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까? 우연한 기회에 국민의힘 인요한 전 혁신위원장의 대담을 들었다. SBS 김태현의 정치쇼 대담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굉장히 존경하는 정치인이 있어요. 아주 정말 잘하는 분, 제가 정말 멘토로 생각하는 분이 이철우 경북도지사입니다. 비서부터 국장까지 그분을 다 좋아해요, 한국 토레이 그룹 이영관 회장은 덧붙인다. 대통령을 해야 할 사람입니다.”

전남 순천 태생의 인요한 위원장이 이 지사를 존경하고, 멘토로 생각한다는 것이 의아했다. 과연 무엇에 그렇게 감복한 것일까? 단적으로 덕에 감복한 것이다. 그렇다면 덕이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덕은 사람의 크기이다. 그 이치를 조금 살펴본다. 덕(德)의 고어는 悳이다. 파자하면 덕(悳)은 즉시 직(直)과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이다. 덕은 “즉각적인 마음의 반응”인 것이다. 엄밀하게는 즉각적인 마음의 반응을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다. 마음의 반응을 바로 외부에 표출하는 사람은 덕이 모자라고 그릇이 적은 사람이다. 반면에 즉각적인 마음의 반응을 차분히 삭였다가 드러내는 사람은 덕이 큰 사람이다. 사람의 그릇이 크면 어떻게 되나?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옆에서 지켜보아도 이 지사의 정책 수행은 억지가 없고 모남도 없다. 아무리 까탈스러운 정책도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하게 한다.

동양의 니체라고 불리는 장자 소요유편에 덕에 관한 우화가 나온다. 어느 날 혜자가 친구인 장자를 찾아와서 말했다. “위나라 임금이 큰 박 씨를 줘서 심었더니 엄청나게 큰 박이 열렸다네. 그런데 너무 커서 물을 담을 바가지나 술을 담을 조롱박으로는 사용할 수 없었네. 그래서 깨뜨려 버렸지.“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여보게. 소가지가 좁쌀만 한 사람아. 자네는 어찌하여 그 큰 박으로 호수에 띄워놓고 즐길 생각은 못 했는가?” 조금만 마음을 열면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음에도 그릇이 작은 혜자는 호리병이나 표주박만을 생각했다. 혜자의 즉각적인 마음의 반응은 큰 박은 쓸모가 없다고 느끼고 깨버렸던 것이다.

지도자의 덕이 왜 중요할까? 정치도 정책도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릇이 큰 사람은 거짓말이나 선동을 할 필요가 없다. 분쟁과 갈등 없이도 별 무리 없이 정책의 핵심을 실천한다. 국력 낭비 없이 사회와 국가의 통합을 이루게 된다. 그래서 리더의 핵심은 덕(德)이다. 덕이 사람을 모으고, 사람을 부리고, 따르게 한다. 리더가 덕이 없으면 장자방 같은 천하의 책사를 옆에 두더라도 그저 장식품일 뿐이다.

그릇이 큰 사람은 잘못을 깨끗이 인정하지만, 그릇이 작은 사람은 항상 남의 탓을 한다. 루비콘강은 한번 건너면 끝이라고 단정한다. 해불양수(海不讓水)라고 바다는 그 어떤 물도 마다하지 않는다. 덕의 본향 경북은 외친다. 유목민으로 살지 말고 경북으로 와서 정주민으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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