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전 경남대 교수·정치학 박사
이재영 전 경남대 교수·정치학 박사

항렬이 우선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항렬이 혈족 간 서열과 위치를 구분하는 문중의 율법이기 때문에, 나이보다 항렬이 먼저이다.”라고 말한다. 나이가 우선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나이는 하늘이 내리고 항렬은 사람이 만들었기 때문에, 항렬보다 나이가 먼저이다.”라고 주장한다. 종친회, 화수회, 집안 모임 등에서 항상 이 문제로 시끄럽다. 나이 많은 낮은 항렬은 나이 어린 높은 항렬에 존대해야 하는 게 기분이 나쁘다. 나이 어린 높은 항렬은 나이가 많은 낮은 항렬에 하대하는 게 영 부담스럽다. 그렇다면 나이와 항렬을 어떻게 정리하는 게 합리적일까?

전통적 관점에서 나이와 항렬의 위계는 간단하다. 유복친족(有服親族)과 면복친족(免服親族)으로 구분하여 위계를 정하기 때문이다. 유복친족은 상복을 입는 관계로써 8촌까지이다. 여기서는 나이보다 항렬이 우선이다. 나이가 많은 아래 항렬이 나이가 적은 위 항렬에 존댓말을 사용한다. 나이가 적은 위 항렬은 나이가 많은 아래 항렬에 하대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항렬 우선이 적용되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나이 차이가 나면,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느 정도’는 6년, 8년, 9년, 11~12년 등 문중마다 다르다.

면복친족은 8촌을 초과하는 관계이다. 여기서부터는 나이가 항렬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이지는 않다. 낮은 항렬이 어느 정도 나이가 많으면, 상대가 아무리 항렬이 높아도 하대한다. 여기서 ‘어느 정도’는 6년, 8년, 9년, 11~12년 등 문중마다 다르다. 나이가 많은 낮은 항렬은 나이가 적은 높은 항렬에 하대하고, 나이가 적은 높은 항렬은 나이가 많은 낮은 항렬에 존댓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서로가 호칭은 정상적으로 한다. 한 항렬 위면 족숙이나 아재(아짐, 고모), 두 항렬 이상 위면 할아버지나 대부(할머니-대모)로 부르면서 하대한다. 한 항렬 아래면 조카님이나 족질님, 두 항렬 아래면 족장님으로 호칭하면서 존대한다. [참고: 문중이 참고하는 나이와 항렬 사이의 존댓말의 기준점]

허교(許交) 5년. “나이가 많은 것이 배가 되면 어버이처럼 섬기고, 10년이 많으면 형처럼 섬기고, 5년이 많으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라가니…” 출처: 『소학(小學)』과 『동몽선습(童蒙先習)』

허교(許交) 7년. 역사상 돈독한 우정으로 유명한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의 연령 차이가 7살이므로 전통적으로 허교의 나이를 그 정도로 잡는다.

허교(許交) 8년. “망년지우를 사귈 수 있는 나이가 상팔하팔(上八下八)이다.” 출처: 안동 출신 재일교포 윤학준이 쓴 양반 문화를 다룬 책 『나의 양반 문화 탐방기』

항렬 접기: “10년이 1 항렬을 접는다”라는 말이 있고, “한 간지(一 干支)인 12년 이상 차이가 나면 위 항렬에 하대할 수 있다”라는 주장도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주장이 통하지 않는다. 문중과 집안의 개념이 희박해지고, 항렬보다 나이를 따지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전통적 사고는 변화해야 한다.

먼저 유복친족이다. 현대사회에서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 범위는 할아버지 자손 정도이다. 제사도 할아버지까지만 모시는 집이 많다. 따라서 할아버지 형제의 자손과 할아버지 직계 자손까지만 유복 친족으로 간주하면 된다. 할아버지 형제자매 중 나와 같은 항렬은 6촌, 할아버지의 직계 자손 중 나와 같은 항렬은 4촌이다. 넓게 잡더라도 6촌까지를 유복친족으로 간주하면 될 듯하다. 이렇게 볼 때 6촌 내에서는 항렬을 우선으로 보고, 나이를 떠나 높은 항렬이 낮은 항렬에 하대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나이 한 살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낮은 항렬이 높은 항렬보다 1살이라도 많으면 서로 존대하는 게 좋다.

다음으로 면복친족이다. 면복친족은 나와 성씨가 같다는 정도일 뿐, 집안 또는 가족이라는 관점을 벗어난다. 따라서 일반적인 관계보다 조금 가까운 사이로 보고 말씨 예절을 정리하면 된다. 나이가 같으면 항렬을 떠나 친구로 지내면 된다. 아래 항렬이 나이가 많고 위 항렬이 나이가 적을 경우, 친한 사이이면 항렬을 떠나 나이 많은 자가 하대하고 나이 적은 자가 존대하면 된다. 친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나이까지는 서로 존대하고, ‘어느 정도’ 나이를 넘어서면 항렬을 떠나 나이 많은 자가 하대하고 나이 적은 자가 존대하면 된다. 여기서 ‘어느 정도’는 친구가 될 수 없는 나이를 기준으로 하면 될 듯하다. 일반적으로 1~2살은 친구가 될 수 있으므로, ‘어느 정도’는 3살 이상으로 잡으면 적절할 것이다.

문중회의, 화수회, 집안 모임 등에서 나이와 항렬 때문에 곤란한 경우가 많이 발생한다. 나이가 많은 낮은 항렬이 나이가 적은 높은 항렬에 말을 안 할 수는 없고, 전통 예법을 따르자니 이상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두 가지만 생각하면 항렬 관계는 굉장히 쉬워진다. 하나는 항렬의 의미이다. 항렬은 문중과 집안에서 자신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위치도일 뿐, 위아래를 지정하는 계급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시대의 변화이다. 8촌까지 함께 제사를 모시고, 종중 전체가 묘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렬의 의미와 시대변화를 고려해서 적절한 예절을 사용하면, 항렬 관계는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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