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데자뷔
문득 떠나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멀리로 떠나고는 싶은데 과연 왜 떠나야 하는지, 떠난다면 무엇으로부터 떠나야 하는지, 답이 있지는 않다. 오히려 답을 찾기 위해서라도 떠나고 싶다. 물론 찾아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하루의 대부분을 ‘이동’하는 데 쓰면, 어느새 ‘그곳’은 ‘이곳’이 돼 있고, ‘나’는 옮겨져 있다고, 최유수는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대도시도 휴양지도 아닌 거칠고 황량한 시베리아로, 겨울이라는 관념 속으로 그는 문득 떠나기를 결심한다.

항공권과 열차표의 값을 치른 순간부터 몸이 근질거리고, 이동한다는 사실 자체가 예비 여행자를 들뜨게 한다. 기다리는 순간부터 무사히 여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순간까지, 저자는 겨울을, 설원을, 제 내면을 이동한다. 그저 ‘이동하는 인간’의 발걸음은, 시리고 언 채로도 가볍다. 그 새로운 몸과 마음의 질량으로 저자는 겨울을 맞닥뜨린다.

강물의 여정을 상상한다. 산맥에서 호수 쪽으로. 오직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물. 이동하는 물. 어느 산의 고원 지대에서 발원해 강 하구를 향해 굽이쳐 가는 물의 이동. 열차의 흐름과 강물의 흐름, 시간의 순류를 따라 미지의 하구로 향하는 나의 흐름까지. 이렇게 생각하면 미래는 참 괴괴하다.

하지만 강물은 알고 있다. 거스를 수 없는 방향성에 관한 비밀을. 실은 열차도 다 알고 있다. 영원할지도 모르는 시간의 비밀을. 나만 모른다. 그래서 나의 미래는 참 괴괴하다. -104, 105쪽

동서남북 네 개 구역으로 하늘이 나뉘어 있는데, 옛날에 서쪽과 동쪽의 신들이 하늘 세계에서 전쟁을 일으켰다. 동쪽의 신들은 전쟁에서 패했고 지상에 떨어졌다. 동쪽의 우두머리 신 텡그리는 사지가 찢겼고, 이후 모두 지상을 혼돈에 빠뜨리는 마법사로 환생했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힘으로 기근과 질병을 다스려 지상 세계를 위협했다.

이에 하늘 신은 게세르와 용사들을 지상으로 내려 보냈다. 게세르는 지상에 내려와 사악한 마법사들과의 전투에서 고초를 겪었지만 결국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어느 산자락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석상들을 발견했다.

모두 게세르와 함께 지상에 내려왔다가 돌덩어리로 변해 버린 하늘의 용사들이었다. 그걸 본 게세르는 눈물을 쏟았다. 이때 게세르가 오른쪽 눈으로 흘린 눈물은 바이칼호가 되었고 왼쪽 눈으로 흘린 눈물은 레나강이 되었다. ? 185, 186쪽

울퉁불퉁한 진흙과 단단한 눈 덩어리가 한겨울의 갯벌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어 밟을 때마다 갈라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이다. 바이칼 호수 위를 걷고 있는 나. 나를 불시에 집어삼켜 버릴지도 모르는 무시무시한 얼음 덩어리를 밟고 있는 나. 발아래 얼음 조각들이 무참히 부서진다. 신중한 걸음과 건조한 파열음의 반복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 198, 199쪽

최유수는 눈으로, 렌즈로 자연을 담는다. 찍은 날짜가 표시되지 않은, 가끔씩 포커스가 아웃된 사진이 그대로 『겨울 데자뷔』에 실려 있다. 쪽수도 없이, 캡션도 없이, 어디선가 떨어져나온 듯한 진흙과 고목과 눈과 강물의 조각은, 우리 독자들을 저자가 걷는 길로 데려간다. 산맥에서 호수로 흐르는 물처럼, 여행자의 시선과 감상이 우리에게 부드럽게 흘러 내려온다. 짧거나 길거나 나른하거나 외치는 듯한 문장 속을 따르던 우리는 어느덧, 바로 이 장면을 오랫동안 잊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는 여행자의 신분이 된다. 현재를 벌써부터 그리워했던 여행자의 조급함과 기쁨을 현재형 시제로 전달받으며, 당신 역시 도착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이곳이 바로 그곳이라는 걸.

곽성일 기자
곽성일 기자 kwak@kyongbuk.com

행정사회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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