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숙 소설가
김외숙 소설가

요즘 멀리 내 나라에서 오는 소식은 어느 때보다 열기로 차 있다. 꽃망울 터뜨리기 시작한 봄소식과 선거 소식이 그러하다.

그러나 겨울이 긴 이 동네의 내 집 앞, 볼썽사나운 덩어리로 앉아 있던 눈은 오늘에야 햇살에 녹아 사라졌다. 함박눈으로 와 잠시라도 오염된 천지를 가려준 그것으로 할 일 다 했으니 진작 녹았어야 했는데, 때를 놓쳤던 탓이다. 스스로 녹아 겨울나무의 수액이 되어야 하고 발아 기다리는 땅속의 씨앗 적셔 움트게 하고 꽃 피우도록 도와야 했는데, 그것이 하늘이 이 땅에다 눈을 보내는 이유요 순리일 텐데, 잔설이 순리를 어긴 것이다.

맑고 곱게 왔으면서도 갖은 먼지 다 쓴 것은 욕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천상에서, 볼 것 많은 땅에 왔으니 금방 녹기 싫었을 것이다. 곱고 깨끗하다는 사람의 탄성에 도취해, 가야 할 때를 놓쳤을 것이다. 그래서 눈은, 누추한 모습의 잔설이란 이름의 벌을 받은 것이다. 알맞을 때 놓쳐 가슴 치는 경우가 잔설에만 한하지 않기에,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시인은, 때를 아는 이의 온당한 처신을 떨어지는 꽃잎에 빗대어 읊었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젊었을 때만, 피어날 때만 한한 것은 아니다. 그 자리에 다시 열매가 맺도록 피어난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도 아름답다. 지는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음은, 양보의 때를 아는 겸손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미련, 욕심,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 혹은 다른 이유가 발목 잡을 때, 그 손길을 단호히 뿌리칠 용기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이유가 심약하면서도 욕심 많은 인간의 분별력을 흐리게 하고, 흐린 분별력으로 머뭇대거나 아니면 그 자리를 내 것인 양 붙들고 있다가 낭패당하게 되는가, 잔설처럼.

때를 아는 일이란 결국, 처신의 때를 아는 일이다. 앉거나 설 때를 알고, 나고 들 때를 알고, 말할 때나 침묵할 때를 알고, 그래서 분란 없이 조화롭도록 뭔가를 도모하는 일일 것이다. 논리 정연한 의견을 피력할 때와 속에 가득한 할 말,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억울해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심정일지라도 그때 말을 멈출 수 있는 용단의 때, 그리고 할 말은 하되 가지 치고 다듬어 꼭 해야 할 말만 드러내는 지혜의 때, 새로운 열정들이 나서면 여전히 열정이 넘칠지라도 비켜서야 하는, 수많은 처신의 때를 의미할 것이다.

누추했어도, 잔설은 이제 흔적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봄기운이 허물 감싸며 녹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 처신의 결과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처신의 분별력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분별력도 착각 앞에서는 흔들린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착각이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금배지를 향한 욕심이 함박눈처럼 난무하고 있다. 모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자칫 잔설의 행색을 부를 수도 있는 착각이다.

이 경우엔 내 편을 향한 햇살 온정이 아니라 분별력이 나서야 한다, 착각과 욕심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국민의 분별력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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