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태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정태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샘물 마신 나그네가 우물 판이의 노고를 새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풍요로운 대한민국 사회를 만든 것은 “농자(農者)”이다. 칡뿌리, 소나무껍질로 연명하던 한국이 K-푸드의 종주국이 되어 컵라면과 김밥까지 수출할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근래 성주 참외가 쿠팡 플랫폼을 타고 세계인의 식탁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경상북도의 시골 마을이 세계적 브랜드의 성지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이고 천지개벽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하다. 드디어 대한민국도 미국이나 프랑스, 독일, 영국처럼 농자(農者)가 든든한 선진강대국이 될 것 같다. 먹고 사는 근심이 없어야 일해도 즐겁고 춤추고 노래하면 더 즐겁다. 그래서 예로부터 나라님과 정치가들, 무위도식하는 이들이 입을 모아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 부추겨 온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농자(農者)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농자(弄者)로 전락하고 있다. 그 때문에 대한민국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데도 수수방관, 속수무책이다. 농자(農者)는 농업, 농민, 농업연구자를 포함한 농사(農事·農士·農師)를 일컫는 말이다. 근대 산업사회의 기반을 만든 농업, 농업혁명의 주역이었던 농민 그리고 그들을 교육하고 지원한 교육자, 전문가들이다. 6·25 폐허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진 학교가 농고와 농과대학이었다. 그곳에서 배양된 농업전사들이 농부도 되고 교수도 되어 대한민국을 괴롭히던 허기를 물리치고 오늘날의 먹거리 대국을 만들었다. 글로벌 시대, 최첨단기술 시대인 지금도 농사는 K-컬처, K푸드를 주도하는 최고의 공신이다. 최근 미국 사회에서 대박을 터뜨린 냉동 김밥도 한국산 김과 밥에 대한 믿음이 없었으면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K푸드가 세계화된 것은 묵묵히 일하는 농사(農士·農師)들 덕분이다. 쌀(米)을 해자하면 88번 손을 거쳐야 수확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만큼 농사(農士·農事)는 힘들고 어렵다. 그리고 농사(農師)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농사들은 교육도 해야 하고 종자개발과 기술개발 그리고 상품개발 관련 연구도 수행해야 한다. 애써 지은 농작물도 팔지 못하면 허사이고, 팔더라도 남는 게 없으면 더 허탈하다. 좋은 종자와 좋은 땅, 그리고 좋은 상품을 만드는 기술이 필요하다. 딸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경상북도 농업기술원에서 토종브랜드 ‘싼타’를 개발하여 보급하기 전에는 대부분 딸기 농가들이 일본산 종자를 구입하느라 비싼 로얄티를 지불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농사를 짓고도 남는 것이 없었다. 지금은 경상북도가 육성한 봉화마을 싼타딸기가 싱가포르와 홍콩, 중국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농사(農師)들의 공로이다. 좋은 농산물을 얻으려면 좋은 종자나 종묘, 토양과 생육환경이 필요하다. 종자나 종묘개발, 토양, 육묘장 시설, 병충해 방재, 상품가공 및 배송기술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딸기의 잿빛 곰팡이병, 참외의 흰가루병, 오이의 총채벌레를 없애려면 내병성 품종연구와 병해충 방재연구가 필요하고, 육질 좋고 청정한 과육을 얻으려면 첨단기술 이용 시설원예 재배기술이 필요하다. 도시형 스마트 플랜트가 대세인 시대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최첨단 정보통신, 인공지능 기술들과도 접목되어야 한다. 세계 소비자들의 입맛을 유혹하려면 고농도 이산화탄소 처리기술과 같은 보존, 배송기술도 있어야 한다. 방금 수확한 것 같은 굵고 싱싱한 싼타딸기를 싱가포르, 홍콩 소비자들이 먹을 수 있는 것은 이들의 노력 덕분이다. 이 모든 성과들은 농과대학의 연구실과 경북도농업기술센터, 농촌진흥청의 공동 작품이다. 농민의 땀과 경험, 연구자들의 고민과 노력, 행정의 적극적인 농사(農思)가 농사(農事)에 투영된 결과이다.

위축되고 움츠러드는 지방소멸 시대, 궁극적인 해답은 농자(農者)에 있다. 농사는 이제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를 넘어 최고의 산업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단백질 공급원이었던 재래콩이 심장에 좋은 기능성 콩으로 재탄생하고, 발효식품의 최고봉인 된장과 간장, 막걸리가 김치와 더불어 세계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좋은 과실을 얻으려면 뿌리부터 가꾸는 것이 순서이듯 농자(農者)가 제 역할을 하도록 지원해야 나라가 바로 서고 지역과 대학도 굳건하다. 지금이 최적기이다. 농대와 농업에 대한 중앙정부와 지역 차원의 과감한 투자와 지지가 필요하다. 대학과 지역이 연구개발(R&D)에 공조하고, 대규모의 첨단기술실습장을 만들어 국내외 현장전문가, 국내외 식량안보 전문가, 탄소제로 시대 농업 탄소중립 기술 전문가, K-food를 담당할 전문가 및 탄소배출권거래제에 대비한 산림전문가를 양성하여 국제사회에서 선진국으로서 임무를 다한다면 농사(農士, 農師)가 대한민국을 살릴 새로운 구세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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