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한순 경일대 특임교수·방통심의위 특별위원
임한순 경일대 특임교수·방통심의위 특별위원

저항 기질이 강했던 생육신 김시습. 3살에 시를 썼고 5살에 세종 앞에서 경연을 할 정도로 천재였다. 그는 단종에 대한 신의를 지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유랑 생활을 했다. 율곡 이이(李珥)는 ‘영원한 스승’이라는 뜻의 ‘백세 스승’이라 그를 불렀다.

김시습의 허리춤에는 표주박이 늘 달려 있었다. 그는 시심이 동하면 숙식을 전폐했다. 시가 완성될 때까지 침잠했다. 그러다 완성되면 시를 쓴 종이를 환약같이 돌돌 말아 표주박 속에 간직했다. 시환(詩丸)이다. 하지만 바람처럼 떠나고 싶어지면 시환들을 펴 계곡물에 먼저 떠내려 보냈다. 혼을 불어넣은 글을 세상에 내놓지 않고 미련 없이 이별했다. 이렇게 문제를 피한 덕분에, 단종 복위를 꾀하다 거열형에 처해진 사육신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사지내 줄 수 있었다.

“자기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관객 없이 산다는 것을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불륜의 여주인공 사비나를 통해 ‘거짓의 불가피성’을 강조한다. “누가 우리를 바라보는 순간 잘하건 못하건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우리를 맞춘다. 그러면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은 참되지 않게 된다. 관객을 갖는다는 것, 관객을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에 사는 것을 말한다.”

SNS의 역습이다. 총선 공천 파동에서 보듯 SNS 글들이 지워지지 않는 전자지문이 돼 줄줄이 돌아오고 있다. ‘관객을 갖는 삶을 위한 증폭된 거짓이었다’고 변명해도 대중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어렵다. 초현실주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이 말한 ‘비밀이 없고 모든 시선에 활짝 열려 있는 유리 집’에 살고 싶지 않다면 조심하고 조심할 일이다.

‘자발적으로 비밀을 포기한 사람은 괴물이다.’ 말의 신중함을 강조한 쿤데라의 조언이다. 환란의 시대를 산, 선비 김시습이 시환에 담은 지혜이기도 하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