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최일만 죽도시장상인연합회장

최일만 죽도시장상인연합회장이 인터뷰를 하고 있다.

죽도시장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 있다.

한 평생을 죽도시장과 함께 해온 최일만(75) 죽도시장상인연합회장.

열세살이 되던 해 잡화상을 시작으로 죽도시장에 첫발을 디딘 최 회장은 수산물 도·소매업에 이르기까지 60년 넘게 죽도시장을 지키고 있다.

죽도시장의 터줏대감격인 최 회장을 만나 죽도시장의 옛 이야기를 들어봤다.

-죽도시장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니까 1948년으로 기억된다. 당시는 모두 어려웠다. 아침을 먹고 나면 저녁을 걱정해야 할 정도였다.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집에는 모두 7형제가 있었다. 큰형님을 제외하고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나는 열세살이 되던 해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초콜릿, 담배같은 것을 파는 잡화상을 시작으로 시장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죽도시장은 모습은 어땠나.

"해방 이후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이 갈 곳이 없어 시장에 천막을 치고 살며 장사를 시작하면서 상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6·25 이후에는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상인의 반이 넘을 정도로 많았다. 한마디로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모여든 곳이었다. 차량이 흔하지 않았던 때라 군용트럭으로 상품을 공급해 왔고, 버스나 열차로도 상품을 수송했다. 좀 있다가는 장 짐만 전문적으로 싣고 다는 차가 생겨나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채소, 과일 등 포항과 인접한 8개 군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모여드는 집산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시장규모가 커졌다. 당시에 칠성천은 복개가 안돼 중앙동, 남빈동에서 죽도시장에 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왔다. 송도, 해도에서 올 때도 나룻배를 이용했다.

그때는 동빈내항 물이 깨끗해 송도, 해도에 사는 사람들은 거기서 건져 올린 조개를 내다 팔아 생활하는 집도 여럿 있었다. 동빈내항에서 잡아 올린 조개는 신선하고 재첩보다 맛있어 인기가 좋았다. 인구가 밀집되면서 당시 하수정화 시설이 없어 폐수가 내려와 동빈내항 조개가 사라진게 정말 아쉽다. 죽도시장 역사를 말하려면 황대봉 대아가족 명예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채소밭이었던 개풍약국에서 오거리까지를 구획정리, 시장에 편입해 지금의 죽도시장의 틀을 갖추게 됐다"

-당시 시장상인들의 생활은.

"모두들 어려운 시절이다보니 상가가 곧 집이었다. 7~8평 되는 상가에서 온 가족이 먹고 자며 생활했다. 규모가 작다 보니 수도시설, 화장실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공동수도에서 떠 온 물로 밥도 해먹었고 화장실은 공용 화장실이 전부였다. 상인 대부분이 시장에서 생활하다 보니 1970년대 당시 영흥초등학교는 학생수가 3천5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대단했다. 시장에서 같이 생활하다 보니 시장상인들은 이웃사촌처럼 정도 많았다. 이후 인근에 주택이 생겨나고 아파트가 들어서며 시장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시장 거주 상인들은 급격히 줄었다. 1960년대 중반쯤 큰 태풍이 와서 시장이 물에 잠겨 시장 상인들이 고생했던 것이 생각난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청소차가 없어 수레로 못쓰는 물건 등을 내다 버리는 등 시장 정비를 했다. 상인들이 자체적으로 힘을 모아 일주일에 걸쳐 시장을 정비했다. 시장규모가 커지자 1970년대 대구 등지에서 소매치기가 모여들어 피해가 많았는데 상인들이 힘을 모아 소매치기를 내쫓았던 것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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