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 태 일

12월이 심상치 않다. 국가정체성과 사회정의가 흔들리면서 극심한 ‘아노미’적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사립학교법에 칼을 들이대다 난장판이 된 국회, 엄동설한에 거리를 헤매며 장외투쟁에 나선 야당, 학교폐쇄도 불사하겠다는 사학연합, 교육을 살려야 할 교육부장관은 ‘법대로 처리 하겠다’는 엄포다. 교육이 법으로 되는 일인지 묻고 싶어진다.

맥아더 동상 철거까지 간 색깔논쟁,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교수가 거리를 활보하고, 부정부패의 몸통(?)이면서도 시효만료로 풀려나는 고관대작, 도청사건에서 보인 정치인들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악덕은 썩을 대로 썩은 한국정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해가 갈수록 지배계층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화되지만 단죄의 기능도, 사회적 정화시스템도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해가 저무는 길목이 더욱 춥고 비관적인 이유이다.

우리 선조들이 이런 난국이라면 어떻게 풀었을까?

조선조 연산군 실록에는 가마솥에 사람을 끓여 죽이는 증형(蒸刑)이란 형벌이 있었다. 가혹하기로는 능지처참에 버금가지만 그 대상은 바로 가렴주구를 일삼는 파렴치한 벼슬아치들이다. 사람을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죽인다는 게 끔찍한 일이지만 지은 죄가 오죽했으면 사대부 체면에 그런 천벌을 받을까 생각해볼 일이다.

우선 백성들의 원성을 산 아무개 부사가 이런 희한한 죽음을 당하니 만백성은 구경 오라는 방을 전국에 부친다. 새남터에 구경꾼이 모여들면 죄인은 가마솥에 들어가지만 불은 곧 꺼버리고 연기만 나게 한다.

얼마 후 구경꾼들은 죽음의 업보를 치룬 탐관오리의 자업자득을 확인하면서 사회정의가 바로 세워지고 가치혼돈의 아노미에서 벗어나며 민초들의 묵은 체증(?)을 다스렸다. 실제로 죽지 않은 죄인은 유족에게 인도되지만 그날이 그의 제삿날이고 평생 동안 캄캄한 골방에 갇히며 가족과의 면회도 국법으로 금지된다. 차라리 죽음보다 더 한 치욕적인 수모와 곤욕, 그 자체가 이 형벌의 은닉된 법정신이다.

백성들의 스트레스를 푸는 제도도 있었다. 탐관오리들의 수탈이 극에 달해 국가적 위기감이 팽배해 민초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때면 흉흉했던 민심을 추스르기 위한 것이 난장(亂場)이다. 강가에 말뚝을 박아 난장으로 지정하면 그 곳에는 살인과 절도 이외의 어떤 사건도 묻지도 벌주지도 않는, 법 효력이 정지되는 ‘치외법권’의 공간이 된다.

보름쯤인 이 기간에는 만백성들의 언로(言路)가 열리고 신분사회의 높은 벽도 무너진다. 그동안 부아가 치밀어도 말문이 막혔던 양반 욕지거리도, 시시콜콜 괴롭혀 온 벼슬아치들의 높은 콧대도 이 때만은 싸잡아서 걸쭉한 술안주로 씹을 수 있다. 그 맛은 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카랑카랑한 소주 맛이다. 노름판이 벌어지고 주정꾼들의 싸움질로 구경꾼이 모여들어도 오불관언이다.

따라서 이 난장은 백성들이 신바람 나는 천국이고 시쳇말로 엄청 쌓였던 스트레스를 확 풀어주는 한국적인 카타르시스(Catharsis)의 고전(古典)이었다. 오늘날 ‘난장판’이란 어원도 본래의 의미는 퇴색했지만 이런 난장에서 유래했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이곳 난장에서 흥청망청 스트레스를 풀 때 나라 임금인 상감마마와 조정의 중신들은 목욕재계하고 하늘을 향해 석고대죄를 드렸다는 점이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며칠을 버티며 자신의 부덕을 하늘에 고하고 민심을 끌어안기 위해 과오를 반성했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의 지배계층에 대한 단죄는 이처럼 준엄하고 추상같았다. 반면 만백성들의 맺힌 응어리를 풀어주는 일에는 세심했고 정성스러웠다. 지배계층의 부정부패는 나라의 근본을 흔들어 놓고 엘리트들의 자정능력 상실은 망국의 근원적인 병소이기 때문이다.

탐관오리들을 증형으로 다스린 연산군의 정치경륜이 돋보인다. 집단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고 있는 국민들에게 난장(?)이라도 마련해줄 따뜻한 배려마저 없는 정치인들이다.

이런 정국에 책임을 지고 옛날 임금님과 중신들처럼 하늘에 자신의 부덕을 고하고 석고 대죄할 이 나라 지도자는 없는지 묻고 싶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