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영 환 <경북통상 고문>

무심한 세월 속에서 사람들은 무심히 살다가 어느 날 죽게 된다.

육순에 접어들어 그동안 자기 인생을 돌아보고 무언가 회고하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정작 그 회고에서 의미있는 걸 찾아보고자 하면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것이 범상인들의 인생이다.

회고록을 쓸 수 있는 자는 파란만장한 삶을 치열하게 산 사람이거나, 아주 비범한 사람이다.

비범한 사람은 주위에서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대상은 매우 운이 좋아 많은 돈을 모았다든지, 출세하여 세간의 부러움을 사는 친지나 지인들이다.

그밖의 사람들의 삶이란 그렇고 그런 것으로 보이는 것이 우리의 인생사이다.

그런데 지극히 범상적인 삶에서도 문득 섬광처럼 특이한 것이 발견되는 수가 있다. 한 친구의 아내가 교통사고의 치료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었을 때, 문병을 간 적이 있었는데, 그는 그의 아내보다도 더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와는 어렸을 때, 이웃에서 살았고, 그 후 교류해 오고 있으니 죽마지우라는 호칭을 붙일 수도 있겠으나, 그런 칭호에 어울릴 만큼 가깝게 지내온 사이는 아니었다. 아내가 퇴원한 후 그의 모습도 전처럼 건강해 보였다.

돌이켜 보면, 그가 30대 초반 결혼한 후 지금까지 30여년이 넘도록 평탄하게 살아온 것이 내겐 믿어지지 않을 만큼 특이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운명적으로나 성격적으로 평탄할 수 없는 친구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10세 때 그의 아버지가 자살한 후 집안이 망했으나, 어머니의 헌신으로 대학에까지 진학할 수 있었지만, 고교시절과 대학재학 중 신경쇠약증으로 휴학하기도 했었고, 첫 직장에서는 해고당하기도 했었다. 그런 그가 결혼한 후로는 풍파 없이 살아온 듯싶다. 직장에서 해고당한 적도 없었고, 아프거나 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었다.

풍문으로는 매우 열심이어서 직장에서 승진이 빠른 편이라는 소식도 전해들은 적이 있었다.

연줄이 없고 학벌도 좋지 않은 그로서 1997년 말 외환위기 때도 용케 견뎌내 60이 넘도록 직장에 붙어있는 것이 신통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직장 동료에게서 한번은 그가 뭔가 열심히 하는 것은 퇴근 후 아내에게 그걸 말해 아내를 기쁘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어린애 같은 유치한 짓으로 생각했다.

그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인들 간에는 서로 쑥스러워 말은 않지만, 조선시대도 아닌 현대에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는 사람이 있겠느냐는 공감대가 있어 그의 사랑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젊어서는 서로 결혼에 얽힌 얘기들을 주고받는데, 그가 말한 자기 결혼에 관한 얘기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르네상스 음악 다실의 깊은 소파에 푹 파묻혀 있는 요정 같은 소녀”를 발견하고 구애했었다든지,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술집에 가자고 해 갔었으나, 그날따라 배가 아파 술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었는데, 결혼 후 장모께서 술 마실 줄 모른다고 거짓을 말했다고 딸을 꾸짖는 걸 보고, 그 때 술을 많이 마셨더라면 어찌 됐을지 모르는 일, 하늘이 도운 결과”라며 좋아하던 그의 모습이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었을 때의 초췌한 그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내가 회복됨에 따라 그의 모습도 좋아져, 젊은 시절의 초췌한 모습은 사라졌다.

아내가 기뻐할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매일 직장에서 열심히 일한 결과가 실력이 되어 험난한 세파를 견뎌내며 저토록 오래 일해 온 것일까.

결혼 후 운이 좋아졌다고만 생각해 왔던 친구에게서, 그것도 30년이 넘는 장구한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어느 날 문득 한 친구의 범상치 않은 사랑을 발견하고 경외감을 느끼게 됐다.

“자넨 아내가 살아있는 한 죽지 못할 것”이라고 내가 말하자, “혈압이 높아 어찌될지 모르겠어”라고 그는 대꾸했다.

“아니야, 혈압이 정상인 나보다 그대가 훨씬 더 젊고 건강해 보이는 걸, 그것은 자네의 아내에 대한 한결같은 아름다운 사랑때문인 것 같아”라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그가 눈을 치켜뜨며 의문을 표시해, “그래, 자네가 바로 축복받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줬다.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이 바로 축복받는 일이라는 걸 깨닫는데 수십년이 걸렸다는 점에 자괴감이 들면서 나 스스로 우둔한 자임을 확인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헌신적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비록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제왕이거나, 신과 대화하는 붉은 옷을 걸친 사제라 할지라도, 나의 이 친구처럼 행복하게 살지는 못할 것 같이 느껴졌다.

하염없는 세월 속에서 한 친구의 삶을 통해 어느 날 문득 가슴 벅찬 축복의 의미를 발견하고, 해가 거듭할수록 이 땅에도 축복받게 될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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