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스턴트식품 범람 밥 외면

쌀이 남아돈단다. 매일 쌀밥 배부르게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던 때가 그리 옛날도 아니고 도시락에 쌀밥 담아가면 선생님께 혼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귀한 쌀이 천덕꾸러기가 될 위기에 처했다.
소비에 비해 생산이 더 많은 게 이유 중의 하나란다. 살인적인 더위를 치러 내고 맞이한 10년만의 대풍인데 자식처럼 공들여 키운 쌀이 제 값을 못 받게 생겼으니 농민들의 마음이 오죽하랴 싶어 한숨이 절로 난다.
쌀이 남아돌게 된 데는 서구적 식생활의 보급이 한몫을 단단히 했다. 간편하다는 이유로, 더러는 왠지 세련돼 보인다는 철없는 이유로 아침상을 빵이 슬그머니 차지하더니 최근에는 버석거려서 과자인지 음식인지 구별이 안가는 시리얼로 1분만에 아침 준비를 끝내는 가정들도 늘고 있다.
각종 인스턴트 음식의 범람으로 점심상에서도 밥이 외면 당하긴 마찬가지다. 그나마 저녁한끼는 아직도 밥이 지키고 있지만 확산되는 외식 문화 속에서 고기 먹고 회 먹은 후 가볍게 먹는 마지막 코스가 되버렸다. 그 뿐인가. 생일 상에도 떡보다는 케익이, 식혜보다는 탄산음료가 더 많이 올라오고 있다. 다양한 음식들이 등장해 우리 먹거리 선택의 폭이 넓어진 건 좋은 현상이다.
하지만 수 천년을 두고 우리 식생활의 중심을 지켜왔던 쌀이 제자리를 잃게되면 밥을 주축으로 해서 형성된 우리 식문화 전체가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한다. 우리가 밥을 멀리하게 되면 세계적 자랑거리인 김치도, 된장도 각종 밑반찬도 설 곳을 잃게 된다. 우리 음식문화 유산을 대를 이어 지켜가도록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자. 입맛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쌀이 제자리를 지키는 것은 미래의 경제를 지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현재 우리 나라 먹거리의 70 퍼센트 이상이 외국에서 들어오고 있으며 쌀이 남아도는데도 많은 곡물을 수입한다. 라면과 햄버거에 입맛이 길들여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밀과 콩, 옥수수 등은 거의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곡물가격은 주 수출국인 미국의 작황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 미국에 흉년이 들면 우리 나라 햄버거 값도 올라간다는 말이다.
매년 9천만명씩 꾸준히 늘어나는 세계인구도 세계 식량 수급에 큰 압박으로 작용해 중국도 12억 인구의 입을 감당 못하고 식량 수입국으로 돌아섰다. 수많은 국가들이 몇 안되는 식량수출국에 의존하다보니 미래에는 식량이 가장 큰 무기가 될 거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굶고는 못사니까 부르는 게 값이 될 수도 있고 시장을 열라, 수입 벽을 더 낮추라는 각종 압력에 제대로 말 한마디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식량 자급자족은 한 나라의 국력이요 자존심이 될 수 있다.
식량자급 능력과 국력이 동의어가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감안한다면 지금의 쌀 ‘과잉생산’을 문제로 돌릴 것이 아니라 기회로 삼을 수 있도록 정부와 농민, 국민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지난 주말 산세좋고 인심 넉넉한 청도군 각북면에서 학생들과 특별한 저녁을 먹었다. 큰 양푼에 가득 담겨 주걱이 꽂혀진 쌀밥을 가운데 놓고 퍼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돼지고기를 숭숭 썰어 뚝배기에 끓여낸 김치찌개, 달짝지근한 가을무를 넣은 고등어 조림, 노릿노릿한 호박전, 된장에 박은 고추 장아찌를 입천정이 데는 줄도 모르고 먹다보니 다들 세 공기를 넘기고 있었다.
어떤 부재료와도 잘 어울리는 쌀의 미덕을 한번 더 확인할 수 있는 기억에 남는 식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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