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동쪽 자락에 통일전이 있다. 신라 통일의 세 영웅이신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이다. 지금은 그 가까이 가서도 옆의 서출지를 갈지언정 통일전엔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인적 드문 곳이지만 한때는 우리 나라 청소년들의 필수답사 코스였던 때도 있었다. 지금 통일전은 우리나라가 통일을 과업으로 삼는 분단국임을, 잠시 쉬고 있을 뿐 여전히 전쟁 중인 분단국임을 상기시키기에는 지나치게 낡았고 초라하여 일대 큰 변신을 해야 할 곳이 되었다.
세 영웅 중 이름이 김춘추였던 태종무열왕은 웅변에 능하고 외교적 수완이 뛰어난 사신으로 일본과 당을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고 군사원조까지 약속받아 삼국통일의 토대를 닦았다. 654년 진덕여왕 사후, 군신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함으로써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 왕이 되었다. 즉위 후 나당연합군을 이끌어 백제를 함락시켰으나 고구려 정벌의 군사를 일으키다가 죽었다. 태자 시절 김유신 장군과 함께 백제 정벌의 공을 세웠던 문무왕은 태종무열왕의 왕위를 계승하고, 고구려를 쳐서 함락시킨다. 15년이 넘는 오랜 전쟁 끝에 당나라까지 완전히 몰아내어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였다. 문무왕은 죽어서까지도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경주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 대왕암에 안장됐다. 김유신 장군이 진평왕,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위의 두 분 왕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불세출의 영웅임을 모를 이가 없을 것이다. 이들의 호국정신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만파식적 설화로 완성된다.
이들 세 영웅들은 낭만적인 에피소드를 많이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김유신의 예사롭지 않은 탄생신화나 무용담, 화랑시절 천관과의 사랑이야기며, 김춘추와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의 혼담은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렇게 잘 알려진 영웅담 말고도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가 또 하나 있다. 삼국유사 탑상편 ‘무장사 미타전’조에는 세상에 전하는 말이라고 하면서 무장사라는 절 이름이 “태종이 삼국을 통일한 뒤에 병기와 투구를 이 골짜기 속에 감추어 두었기 때문”에 유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는 투구를 의미하고, 장(藏)은 감춘다는 뜻이니 절이름과 딱 들어맞는 얘기이다. 이 절의 유래담은 그 후의 기록에서는 태종과 문무왕이 서로 혼동되기도 한다. 삼국통일의 완성은 문무왕대에 된 것이니 문무왕으로 해석한 결과인 듯하다. 또 무기를 감추었다는 기록은 무기의 일시 저장, 혹은 무기의 영구 매장의 두 가지 상반된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들 전쟁터의 영웅들이 무기를 깊숙한 골짜기에 깊이깊이 감추어 두고자 한 뜻을 헤아릴 일이다. 무장사가 있는 골짜기 이름조차도 암곡(暗谷), 삼국유사에도 골짜기가 험준하여 마치 깎아 세운 듯 깊숙하고 침침한 곳으로 적고 있다.지난 해 2003년을 회고 정리할 즈음 문득 무장사의 유래담이 떠올랐다. 국내외적으로 작년만큼이나 나라 안팎이 얼룩덜룩한 해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심란한 해였기 때문이었을까.
작년과 올해가 달력 바꿔 걸 듯 달라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정도로 온갖 전쟁의 우울한 기운은 여전하다는 생각은 떨치기가 힘들었다. 이런 사위스런 생각이 정월 초하루의 해돋이를 남 먼저 보는 아우성으로 지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었다.
몇 백년간의 전쟁을 무기 묻어버림의 결단으로 종식시킨 우리 선현의 지혜를 깨닫고 본받아야 할 시점, 무장사의 존재가 새삼 소중해진다. 분단 조국, 통일의 지혜도 영웅의 승리를 기리기보다 전쟁의 종식을 선언하듯 무기를 버린 행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정 옥<위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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