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대학의 위기’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새삼스러운 화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청년실업과 연계되면서 우리 사회의 큰 숙제가 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이유에서 ‘대학의 위기’는 웬만한 규모를 갖춘 매스컴 기관과 공(公)기관에서 적어도 한 두 번쯤은 언급되고 논의되어 온 낯설지 않은 문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여론과 여론 기관들이 이 주제를 논의하는데는 대체적인 취향이 있는 것 같다. 즉 외국의 유명 대학과 우리나라 대학(들)을 미리 설정된 어떤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그 자질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이다.
또 이어지는 논의는 그 비교의 결과를 가지고 우리나라 대학의 낙후성과 열등성을 지적해 가는, 그런 순서를 밟는 듯 하다. 물론 그런 안목에서도 우리나라 대학이 안고 있는 현 위치와 또 안고 있는 난제들을 밝혀주는 역할을 해낼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학의 위기와 그 평가에 즈음해서 필자는 간단하지만 중요해 보이는 또 다른 하나의 기준을 제시하고 싶다. 그런데 이 측정기준은 필자가 아는 어느 교수 한 분에게 들은 간단한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이를 옮기면 그 분 친구 중에 공장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친구 분이 그에게 묻기를 “공장에서 불량품을 만들면 기업가가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하는데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불량품은 누가, 어떻게 책임을 지는가?”를 물었다고 한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국 대학이 스스로 고민하고 각성해야 할 대목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한다. 즉 한국의 대학들은 그의 졸업생을 배출함에 있어서 과연 “우리 대학의 학사, 석사, 박사가 한국사회 앞에서 그 질적 수준이 부끄럽지 않으며 또 대학은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라는 양심고백을 할 수 있느냐의 그런 물음이다.
그런 기준에서 사회도 이를 감독해야 한다. 그런데 다 아는대로 한국 대학들은 대체적으로 그들의 관심이나 고민의 초점을 여기에 맞추고 있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대학을 어떻게 잘 포장해서 학생을 잘 모을까?”에 한국 대학들은 대체적으로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한국 대학의 위기를 조명하고 설명하는 모델로서 앞서 언급된 바, 세계 유명 대학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너무 외면적이고 단면적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어떤 대학이 기업체의 경우에서 ‘삼성’처럼 그의 꿈인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취되었다고 하자. 그럼에도 세계적 우량 기업인 ‘삼성’하나가 우리나라 경제 전반의 문제를 해결 못하듯이 대한민국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세계 일류대학 하나가 한국 사회의 대학 위기를 해결해 낼 수 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또 이 경우, 답변에서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은 것은 독일과 같은 전혀 다른 모델의 대학과 사회다. 즉 지방 분권주의를 전통적으로 그 기초를 깔고 있는 독일 대학의 경우, 소위 세계적인 명성면에서는 걸출한 대학이 별로 없어도 대학들 모두가 균형있게 발전된 그런 형태다. 아예 독일 사회와 문화 전통은 ‘그런’ 일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영국이나 프랑스대학들 보다 못할 것도 전혀없다. 예를 들면 고도의 과학 기술의 기초와 높은 사회적 생산성을 대변하는 세계 무역 수출의 경우도 독일은 거의 언제나 세계 1,2위에 있다.
한국 대학들이 어떤 목표를 지향해야 할까? 그것은 간단해 보인다. 대학은 무엇보다도 성실과 집중된 노력으로 수준있는 우량의 학생들을 길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졸업생들이 우리나라 사회에서만이라도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일이다. 대학 평가의 적정한 기준도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배 우 순
<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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