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젊은이들에게 웅변술과 지식을 가르치던 ‘소피스트’의 본뜻은 ‘지혜있는 사람, 지혜를 주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많이 변질돼 궤변가로 쓰인다. 플라톤의 저서에 소피스트 ‘에우튜데모스’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날 에우튜데모스가 한 소년에게 물었다. “배운다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하는 일인가, 아니면 우둔한 사람이 하는 것인가” “현명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배우고자 할때 그 사람은 그 내용을 알고 배우나” “아니요. 모르니까 배우지요” “그럼 모르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수 있을까” “아니지요” “현명한 사람이 아니면 우둔한 사람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우둔한 사람이 아닌가. 자네의 처음 대답은 틀렸지” 에우튜데모스의 논리적 궤변에 소년은 황당할수 밖에 없었다.
궤변으로 이름 높은 골기아스의 제자 안테스티네스가 마을 건달들과 친하게 지내자 어떤사람이 충고했다. “왜 품행이 나쁜 사람과 사귑니까. 당신의 인격이 의심받게 될까 걱정입니다” “걱정말아요. 의사는 환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병에 안걸리잖소”
온갖 비방과 설전(舌戰)이 난무하는 정치판엔 소피스트적 궤변이 판치는가 하면, 폐부를 찌르는 ‘촌철살인(寸鐵殺人)’이 번뜩이기도 한다. 최근 ‘정부와 언론의 전쟁’을 둘러싸고 여야공방이 치열해지면서 독설과 변설이 무성하다.
“언론이 최후의 독재권력으로 남아있다” “특정 언론이 자사 이기주의를 위해 별것 다 한다는 인식이 형성될때 이번 세무조사의 승패가 가름될 것이다” “정치인은 임기가 되면 선거로 국민의 심판을 받지만 언론은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한국사회를 좌지우지했다”
“민주화와 사회발전의 격동속에서, 역사발전의 도도한 흐름속에서 우리신문은 그래도 제자리를 지키기위해 안간힘을 써왔다. 영원히 묻혀버릴 뻔했던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 세상에 알려 역사의 물줄기를 민주화로 돌린 것도 우리신문이다” 한 여권 의원의 발언이 신문의 긍지를 살렸다. 누가 궤변을 뇌까리고, 누가 촌철살인의 말을 하는지는 국민이 심판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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