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이란 그 구름이 흩어짐이다. 삶과 죽음이란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짐에 불과하다’ 이것이 불교의 생사관. 그래서 茶毘式에 낭독되는 弔辭는 그냥 ‘축사’다. “생사 거래 없는 곳으로 가셨으니 좋으시겠습니다. 이제 꿈같은 세속일 다 놓으시고 대자유의 환희를 누리소서” “행장을 수습하시어 적멸의 고향에 돌아가시니 大自由人이 돼셨습니다”
1985년에 입적한 惠庵대선사는 “내 몸을 불살라 뼈가루를 산천에 뿌리고 사리도 수습하지마라. 사리탑이나 부도를 절대 세우지말라. 그런 것을 세우면 나는 세세영원토록 지옥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란 유언을 남겼다.
고승들이 “사리란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라 했지만 속인들은 그렇지가 않다. 이번 혜암종정의 ‘사리 86과’를 전국 모든 언론들이 보도했다.
사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승들의 살아온 일생이 귀한 것이다. 慧菴은 1946년 인곡스님밑에서 출가했고, 50년 넘는 세월동안 하루 한끼만 먹고, 누워서 잠자는 법이 없었다. 스님의 거처인 해인사 원당암 미소굴에는 이부자리도 없고 베개도 없다. 좌선하는 방석 하나와 죽비, 生死解脫이라 쓴 자필 액자가 있을 뿐이다.
오대산에서 여러 스님들이 수행할 때인데, 한 스님이 느닷없이 혜암의 가슴을 힘대로 걷어차버렸다. 갈비뼈가 부러져 병원에 실려가면서 혜암은 그 중을 향해 “전생에 내가 스님을 때린 모양입니다. 미안합니다” 했다는 일화도 있다.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중 노릇하자’며 이른바 ‘봉암사 결사’를 할 때 혜암은 성철, 청담, 향곡, 자운 등 선배스님들과 함께 참여했다. 오대산에서 수행할 때는 물과 잣나무잎만 먹고 4개월 이상을 지내기도 했다. 감기몸살이 들면 한겨울에 얼음물속에 들어가 치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혜암은 산꽃과 들꽃을 좋아해서 원당암 미소굴 주변에 야생화를 많이 심었고, 풀꽃씨를 뿌리며 “일체중생이 다 꽃이다”했다. “나의 몸은 본래 없는 것이요/ 마음 또한 머무르는 곳이 없다/ 쇠로 만든 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돌사자가 소리쳐 부르짓는다” 이 臨終偈(임종게)의 의미를 속인들이 어찌 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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