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이 가장 염려한 것은 외척(外戚)의 발호였다. 그는 쿠데타로 왕위에 오르자 왕위옹립을 도운 자신의 처남들을 제일 먼저 제거한다. 태종은 외척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부러 ‘선위(禪位)파동’을 일으켜 민무구 민무질 두형제를 역모로 몰아 죽인다.
그는 처가뿐만 아니라 아들 세종의 처가권속까지 도려낸다. 태종은 상왕으로 있으면서 세종의 장인 심온이 자기를 비난했던 죄를 물어 처형했다. 태종의 외척제거는 모두 공작정치에 의해 이뤄졌다. 조선조 개국초기에 태종의 외척억압책으로 왕권이 강화되면서 오랫동안 외척들은 기를 펴지 못했다.
인기 TV사극 ‘여인천하’에 나오는 ‘조선의 측전무후’ 문정왕후가 12살의 어린아들 명종의 수렴청정을 하면서 외척전횡시대의 막이 열렸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과 짜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등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다.
실세로 등장한 윤원형은 애첩 정난정을 앞세워 대상(大商)들과 결탁, 상권까지 휘어잡고 전매와 모리로 치부에 혈안이 된다. 윤원형의 집에는 뇌물이 쇄도했고, 서울에만 집이 15채나 됐다. 권력을 탐했던 척신들은 다투어 정난정의 자녀들과 혼맥을 맺었다. 하늘을 찌를듯한 권세를 누리던 이들도 문정왕후가 죽은뒤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의적 임꺽정이 나선 것도 이때였다.
영조가 예순다섯에 새로 맞이한 15세의 어린 왕비가 정순왕후다. 정조가 집권하고 있는 동안 가만히 엎드려 있던 정순왕후는 왕이 죽고 11살의 어린왕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되자 오라비 김관주를 요직에 앉혀 국정을 주무르게 했다.
정순왕후가 죽고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가 순조의 비로 책봉되면서 조선몰락을 재촉하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본격화된다. 안동김씨들이 요직을 전부 차지해 견제세력이 없어지자 부정부패가 만연, 민란이 끊이지 않았다. 홍경래난이 일어난 것도 이때의 일.
조선조의 쇠망은 외척의 발호 탓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 처조카가 벤처기업인과 짜고 보물선 발굴에 국가기관을 동원, 국정을 농단한 혐의로 구속됐다. 외척의 발호는 예나 지금이나 망조임에 틀림없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